내 언제 무신하여 - 낙엽소리가 나를 속이네
황진이의 시조 중 한 수입니다. 황진이는 매우 열정적으로 남녀 사이를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탁월하였습니다.
우선 원문 ;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소겻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네
추풍(秋風)에 지는 닙 소릐야 낸들 어이 하리오
(원문의 표기를 알 수 없는 중에 몇 백년간 이어져 내려왔으므로 황진이가 어떻게 표기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서 삼경은 밤 12시부터 2시까지의 시간입니다. 매우 갚은 밤이지요. 사람의 기척이 또렷이 들리는
시간입니다.
이 시는 순서에 따라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원문을 현대어로 옮기면서, 다시 읽자면 ;
내 언제 신의없이 님을 언제 속였길래
가을 바람 지는 잎 소리가 님 오는 소리인양 나를 속이는가
깜짝 놀라 밖을 보니 님이 온 흔적 전혀 없네.
이렇게 다시 풀어 쓰면 조금더 논리적으로 변하면서 산문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를 적어 내려갈 때의 팽팽한 긴장감은 훨씬 느슨해 졌습니다. 황진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순서대로 적어 보자면,
나는 결코 님을 속인 적이 없다
님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밖에서 나는 소리에 설레었건만 알고보니 가을 바람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였다. 님을 속인 적이 없는 나를 낙엽이 속였다. 그러므로 낙엽으로 하여금 나를 속게 한 사람은 당신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런 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일에 무슨 순서와 차례가 있겠습니까? 참다 참다 큰 기침이 터져 나오려 할 때에 침방울이 먼저 나오느냐 바람이 먼저 나오느냐를 묻는 것같이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시는, 시로 표현하는 내 마음이란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이 작은 종이 위에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운 좋은 후배들이 읽어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나중, 나중 일입니다.
(사족)
1. 그렇다 하더라도 저렇게 말하는 순서를 바꾸어 가면서 자기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황진이 같은 시의 절정 고수만이 할 수 있는 솜씨입니다.
2. 첫 행에서 ‘언제’ 가 두 번 나오는데 경상도 방언 ‘언제’ 혹은 ‘언지예’와 같은 용례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일어난 시간이 도대체 언제란 말이냐?’의 뜻이지만 실생활에서는 ‘아니오’ 혹은 ‘아닙니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짧게 ‘언제’ 혹은 끝을 들면서 ‘언제~’하면 강한 부정, 짜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로 남편이 잔소리하는 아내에게 혹은 사춘기 중학생이 자기 부모에게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길게 늘여서, 특히 미혼 여성이 남성에게 ‘어언지예에~’하고 발화하면 부정 반, 애교 반, 긍정 반입니다. 이 경우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속마음을 짐작했다가는 큰 일 납니다. 몇 가지 증빙을 더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경상도 총각들은 이 말을 들은 다음에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합니다. 게임 끝이지요.
저는 부산 싸나이. 칼 같이 구별하며 살아왔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