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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일 Jun 08. 2024

남한산성

남한산 산행기

성남 시내를 가로질러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한때 남한산성에 자주 오르던 시절 있었지만, 그 후엔 별 볼  던 산이다.

산성역 지나 언덕길 접어드니, 차량행렬이 길게 이어. 도심과 달리 이 길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 보인다.


꾸불탱이 도로 모두 지나고 등산안내판 마주한다.

안내판을 앞에 두고 "역사테마길 3코스 당첨"이라고 혼잣말을 내뱉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남한산' 정상에 좌표를 찍는다.


남한산성에 '남한산'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처음 알게 됐다. 

"남한산성 갔다 왔다" 사람들은 봤지만, "남한산 간다" 이야기는 아 들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산행은 남한산보건소 입구에서 시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산 안내판에서 봤던 현절사(顯節祠)가 눈에 든다. '사찰'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은 것 같은데, 대문 안쪽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낙네와 내부를 둘러보는 등산객이 언듯 스친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대문 안으로 흘깃 보 모습에 호기심 발동해 조심스럽게 발길을 들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반백()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며 '현절사'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신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 청나라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척화파의 수장이었던 김상헌 그리고 정온의 위(位牌)를 모신 사당"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현절사

1636년 추운 겨울.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공격하자 인조는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강화도로 몽진할 계획이었지만, 청나라 기마병들이 먼저 길목을 막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몸을 피한 것이었다.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항전을 펼치겠다는 전략이었으나, 지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않았고, 고립된 성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청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내려오자 조정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임금이 치욕스럽더라도 백성을 살리기 위해 속히 항복하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화친파에 더 힘이 실리고 있었다.

명길이 항복 국서를 지었지만 김상헌은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항복 문서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인조는 47일 만에 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의식을 치다.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중시하 조선이 오랑캐나라로 여기던 청나라에 략당하고 임금이 접 나서 머리를 조아린 것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인 일이었다.


사당을 나와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이라 해봐야 얼마 안 가서 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남한산 정상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조금 더 오르니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고, 성 외부로 드나드는 암문이 나타난다. 암문을 나가니 산 아래로 서울 도심이 보이고 또 다른 성문이 나타난다. "성 안팎이 헷갈리는 한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늘 없성벽길이 이어지고, 얕은 언덕길 올라 서니 '남한산'이라 적힌 정상석이 나타난다. 봉우리 아닌 평평한 곳에 선 게 특이지만,  매끈하고 참하게 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 찍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남는다. "진짜 이곳이 정상 맞." 하는 의구심 드는 지형 때문이다.


밋밋한 언덕 끝자락으로 몇 발짝 옮기니, 능선 따라 길게 이어진 성벽과 파란 하늘에 한가로이 떠다니는 뭉게구름 보인다.


지금은 하늘과 땅 모두가 평화로워 보이지만, 400년 전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만 하던 그날의 슬픈 역사가 있.


병자호란왜 일어났으며,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조선의 대응은 어?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던 명(明)과 떠오르는 군사강국 청(淸) 사이에서 보인 조선의 '외교 실패' 사례는 다시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병자호란 이후 긴 세월 흘렀지만, 우리가 놓인 지리적 위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6.25 이후 70여 년간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전쟁이 없었던 적 없었.

너무 평화로운 세상 살다 보니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중요한 가치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평화도 스스로 힘이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봉암성
남한산 정상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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