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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일 Dec 18. 2022

아!  민주지산

민주지산 산행기


산객들을 가득 태운 버스가 도마령 정상에 정차고, 소대 병력 만큼 산객들을 하차시킨다. 산객들은 혹한기 훈련 나가는 군인들처럼 단단하게 배낭을 챙기고, 하나둘씩 산속으로 황급히 사라진다.


초반부터 가파른 언덕길이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고 함박눈이 앞을 가리니, 속도가 더 늦어진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첫 번째 봉우리 각호산에 오른다.

맑은 날에는 민주지산 정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겠지만, 눈 때문에 정상석만 빼꼼히 보인다.


민주지산은 설경이 아름답지만, 폭설로 인한 인한 슬픈 사연이 있다.


24년 전 그날도 오늘처럼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 5 공수 여단 공수부대원들이 천리행군 훈련 중이었으며, 민주지산을 통과하는 코스였다.

출발할 때는 훈련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약한 슬비가 내렸지만, 6부 능선을 나며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닥칠 사고에 대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4월에 내리는 눈이라며 전우들끼리 사진 찍으며 즐거워했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지만, 대한민국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에게 큰 문제 안될 것으로 판단하고, 민주지산을 돌파하기 위해 빠르게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폭설이 쏟아졌고, 기온이 급강하했다. 더군다나 비를 맞은 상태로 행군을 했던 터라, 체력도 바닥으로 떨어다.


강풍 폭설이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 행군대열이 흩어지고, 눈 속에 갇혀 탈진하는 병사들이 생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무전기 배터리 방전으로 통신까지 두절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며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저체온증으로 주저앉은 병사들의 눈동자는 희미하게 풀어졌고, '안되면 되게하라'는 특전사 군인정신으로 다져진 강한 체도 서서히 굳어져갔다. 그렇게 여섯 명의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앞만 보고 눈길을 헤치는 사이 갑자기 하늘이 열다.

산새를 알아볼 정도로 맑아지지는 않았지만, 눈앞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마다 목화꽃망울 터진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늘이 보이는 것도 잠시, 또다시 눈이 내리고 시야가 막힌다. 민주지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이라 편하게 이동할 수 있 곳이지만, 폭설 탓에 심때가 훌쩍 지나 정상  대피소에 이른다.


대피소 앞 작은 돌비석이 1998년 이곳에서 사한 6인의 장병 넋을 기리며, 그날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다.


좁은 대피소 안으로 드니, 내부를 꽉 채운 수증기가 얼굴에 확 와닿으며 끈적한 느낌 몰고 온다.

빽빽하게 들어찬 산객들이 내뿜는 입김과 컵라면에서 나오는 수증기한증막 만들다.

코로나 시기에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 한쪽 귀퉁이에 엉덩이만 걸치고, 먹다 남은 김밥과 물 한 모금으로 허기를 때운다. 함께한 산 동무는 선 채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힘을 내, 이내 정상에 오른다.


주변 조망은 하나도 이지 않고, 칼바람과 눈발만이 흩날리고 있다. 

눈 속을 헤치고 힘들게 올라온 탓인지, '민주지산'이라 적힌 큰 정상석 엄청 반갑.

고지를 향해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적군 진지를 탈환한 군인이 느끼는 희열이 바로 이런 것일까.


'눈 내리는 날은 피하는 게 다'라말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폭설 속 산행은 눈길 걷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눈 오는 날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깜깜한 밤 경치를 보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경을 보고 싶다면, 눈 내린 다음날 오르는 게 좋다.

운이 따르눈이 부셔 선글라스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반짝는 설경을 만날 있기 때문이다.


폭설 속에 끝까지 함께한 산 동무와 정상석 인증사진 서로 찍어주고, 눈보라를 피해 급히 물한계곡 하산길로 접어든다.

민주지산 정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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