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산행기
이른 시간 콩밭 매는 아낙네상 앞에 선다. 칠갑산에 올 때면 언제나 이 아낙을 제일 먼저 만난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가? 아낙네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인다. 흰색 페인트가 묻었는지, 도색이 벗겨져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아낙네 눈이 보기 흉하게 변했다.
"혹시 백내장이라도 걸렸나."
무던한 표정과 또렷한 입술 모양을 가진 미인형의 젊은 아낙네 모습이었는데, 부쩍 나이 들어 보이고 호미 든 손도 병든 사람처럼 힘이 없다. 며칠 전 폭우 때문에 이리된 걸까....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콩밭 매는 아낙네를 흥얼거리며 장곡사 방향으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3km 남짓한 거리, 길이 험하지 않으니 한 시간 정도로 잡고 서두른다. 반바지 차림에 운동화처럼 생긴 등산화를 신은 탓에 발걸음이 가볍다.
장곡사 앞에 이르니, 주차된 차량만 몇 대 있을 뿐 산사가 조용하다. 사찰을 옆으로 비껴 곧장 가파른 등산이 시작된다. 며칠 전 폭우 때 세워진 입산통제 경고판이 그대로 서 있지만 무시하고 나무 계단을 빠르게 치고 오른다.
덥지 않은 날씨가 그나마 다행이지만, 먹을 거라곤 생수 두 통과 사과 반쪽이 전부라 얼른 다녀와야 한다.
조망 없는 숲길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한참을 지나 '아흔아홉구비' 촬영장소라는 안내와 함께 첫 조망이 터진다. 푸른 녹음 위로 펼쳐지는 시원한 조망을 즐기며 잠시 땀을 식힌다.
다시 정상으로 향하니, 이내 "七甲山"이라 적힌 정상에 도착한다. 조망이 뛰어난 곳은 아니지만 널찍한 평지 한 귀퉁이로 넝쿨나무와 조화를 이룬 평상 하나가 한가로이 놓여 있다. 여럿이 둘러앉아 음식 나눠 먹으며 쉬어 가기에 딱 좋아 보이는 곳이다.
저쪽으로 내려가면 천장호 출렁다리를 구경할 수 있지만, 장승공원에 차를 두고 왔으니 원점 회귀를 해야 한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 하나 찍고 하산을 서두른다.
먼저 내려간 산객들을 따라잡았지만 가벼운 인사말만 나누고 급히 앞지른다. 아침을 안 먹고 올라온 터라 산행에 대한 감흥보다 산채비빔밥 생각이 간절한 상황이다.
다시 장곡사에 이른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이끌려 하(下) 대웅전 앞으로 나아간다. 맞배지붕 형식을 띤 아담한 대웅전 안으로 스님 뒷모습이 보이고 염불 외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만, 비구스님인가 하는 의구심만 잠시 스칠 뿐 확인할 수 없다. 국보 두 점에 보물도 몇 개 가진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목탁소리 뒤로하고 경내를 돌아 나온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고, 발걸음은 어느덧 밥집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 점심 먹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한 테이블밖에 없다. 딸만 셋인 가족인데, 세 명 모두 비슷한 이미지를 가졌기에 한번 더 눈길이 간다.
산채비빔밥 한 그릇 주문하고 기다리자니, 따님들이 떠드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다 큰 딸만 셋인 가족이라 그런지 음식 주문하는 것부터 의견이 다르고 말이 엄청 많다. 무뚝뚝해 보이는 아빠는 아무 말씀 없으시지만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묻어난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식당을 나서니 올라올 때 만났던 콩밭 매는 아낙네를 또 만난다.
저 아낙네처럼 머리에 수건 두르고 호미로 밭 매는 모습은 어릴 적 흔히 보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밭고랑마다 비닐 덮고 농약을 수시로 뿌려대니, 콩밭 매는 풍경은 없어졌고 '고추 따는 아낙네'만 가끔 볼 수 있다.
칠갑산은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는 딸과 입하나 덜고자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모녀간 애절함이 묻어나는 슬픈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