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불암산으로 향한다. 서울의 북쪽에 자리한 이 산은 그리 멀지 않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이 없다. 오늘은 그 낯선 산을 만나기 위해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주변에는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반원을 그리며 놓여 있고, 이 다섯 개의 산이름의 첫 글자를 따 "불수사도북"이라 부르는 종주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불암산은 높이 508미터 화강암 바위산으로, 큰 바위가 모자 쓴 부처처럼 보인다 하여 불암산(佛岩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남북으로 능선이 뻗어있고 태릉, 광릉, 동구릉 등 왕릉이 여러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불암산 남쪽사면에 육군사관학교와 태릉선수촌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선수촌은 몇 해 전 진천으로 이전했다. 태릉선수촌 시절 "국가대표 선수들이 불암산에서 크로스컨트리 훈련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던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산악훈련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불암산 오르기 훈련에서는 주로 권투와 레슬링 선수들이 상위권에 들었으며, 역대 최고 기록은 세계챔피언 출신 문성길 선수가 세운 21분대 기록이었다고 한다."
불암산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분이 한 분 계시다. 바로 국민배우로 불리는 최불암(崔弗岩) 선생이다. 요즘 "1958 수사반장"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어릴 적에 재미있게 봤던 "수사반장"을 모티브로 새롭게 제작된 TV 프로그램이다. 젊은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수사반장 하면 역시 최불암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흑백 TV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드라마를 보던 시절, 최불암은 세상 나쁜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정의의 사도였고,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국민배우로 칭송받는 최불암 선생은 노원구로부터 불암산 명예 산주(山主)로 위촉되었으며, 그가 직접 쓴 시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건조하고 팍팍하다. 물기 하나 없는 계곡에서는 푸석한 지푸라기만 날리고 있다.
산행이 단조롭지만, 산객들이 떠드는 소리가 지루함을 달래준다.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오르니, 깔딱 고개 정상에 올라선다. 평상처럼 생긴 나무 데크가 놓여있고, 등산로가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다.
이정표를 언뜻 보고 오른쪽으로 향한다.
10분쯤 지나니 불암산성 안내판이 보이고, 평평한 헬기장이 나타난다. 꼭대기까지 다 오른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봐도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이정표를 다시 보니, 방금 지나온 방향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허 ~ 그거 이상하네. 지나온 길에 봉우리는 없었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니, 내가 지나온 방향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면 정상이 나온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깔딱 고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내가 반대방향으로 온 것이었다.
"세상 살다 보면 헛일할 때도 있는 거지 뭐...."
날씨도 덥고, 헛걸음했다는 아쉬움을 달래며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
내리막길이라 올라올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500미터 정도만 가면 되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조금 전에 올랐던 헬기장 봉우리와 달리, 이번에는 등산 느낌이 나는 바윗길 능선으로 이어진다. 뜨거워진 바위 열기 때문에 온몸이 확 달아오르지만, 탁 트인 조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계단을 따라 몇 걸음 더 오르니, 우뚝 솟은 봉우리 위로 태극기가 보인다. 정성석 앞에는 인증사진 찍는 산객들이 모여 있다. 주말 산행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삼 일간 이어지는 연휴라 그런지 산객들 표정은 밝고 즐겁다.
바위 위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 있다.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해도 뭐가 보이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바위에 걸쳐진 밧줄을 잡고 유격 훈련하듯 바위를 기어오르고 있다. 밧줄이 얼마 전에 교체된 듯, 아직 손때가 덜 묻은 깨끗한 줄이다. 조금 무섭긴 해도 썩은 동아줄은 아니어서 끊어질 위험은 없어 보인다.
아! 이곳이 불암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흐릿한 날씨 때문에 멀리까지 보인지 않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산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자연 전망대 덕분에 심리적인 높이는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게 느껴진다.
북쪽으로는 불수사도북 코스를 이어가는 능선이 뻗어있다. 상계동 도심 건너편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가까이 보인다. 도심 사이로 이렇게 아름다운 산줄기가 뻗어 내린 곳은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저 아래 고층아파트 사이에 있을 때는 삭막함이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아파트와 푸른 산이 조화롭고,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세상이 정말 멋지다.
낮에 보는 경치도 좋지만, 특히 야경이 끝내준다고 한다. 밤 경치도 한 번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