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입이 닳도록 말했듯 나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제2의 삶을 꿈꿨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거창한 것을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시작은 현실도피였으므로 그냥 어디든 떠나고 싶었고 그래서 정한 곳이 캐나다 밴쿠버였을 뿐 꼭 캐나다 밴쿠버여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당시 내가 밴쿠버에 간다면 꼭 하고 싶었던 일 첫 번째가 겨우 팀홀튼 아이스캡 사 먹기 정도였으니 말이다.
밴쿠버에서 하고 싶은 일 리스트 1번을 해치운 날
게다가 나의 캐나다 밴쿠버 워킹홀리데이는 특별히 내가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워홀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면 다음은 이미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고 면접을 보고 난 후에는 그냥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코로나 시국이라 여행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면접
이후 나는 계속 그냥 예정된 일을 하나씩 해 나갔다. 자가격리 후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 보니 2~3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마침내 면접을 보기로 한 날이 되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면접이기도 했고 그냥 사장님과 얼굴만 본다고 생각하라고 했지만 역시나 영어라는 문제가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캐나다행을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단 한 번도 예정대로 흘러간 일이 없는 걸까. 면접을 보기 위해 면접장소에 도착한 나는 교통상황으로 인해 조금 늦어지는 사장님 대신 매니저와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면접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녀가 묻는 말에 막힘없이 답했고 이 일에 열정이 있다는 모습 또한 보이려고 노력했다.
영어는 어느 정도 해요?
자신감을 잃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면접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그녀가 던진 질문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런 걸 PTSD라고 하던가? 그 짧은 순간에 한국에서부터 밴쿠버에 오기까지 그 사이에 영어로 인해 수없이 무너져 내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영어는 잘 못해요.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어도 괜찮아요. 비슷한 일을 했던 경험도 있고요." 혹시나 일을 할 수 없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서둘러 대답했다. 그녀는 그러냐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부드럽게 웃었고 그럼 주방에서 일을 하며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 홀로 나와 그때부터 서버로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정신적으로 고통받느니 차라리 몸이 고생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방에서 일을 시작하다.
시작은 디시 워셔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예정대로 서버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한 번 일을 하기 시작하면 포지션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홀보다 주방에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웬만하면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이 힘들진 않아요?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힘들어도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막상 일을 하다 보니 주방일도 그럭저럭 나름 할만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장 좋았다.
첫 번째 체크를 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먼 나라 캐나다 밴쿠버까지 와서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힘들기도 했지만 마냥 신이 났다. 하필이면 코로나라 돈을 많이 벌어도 마땅히 쓸 곳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통장에 차곡차곡 돈이 쌓여간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그때는 그냥 얼른 돈을 모아서 학자금 대출금이나 한 번에 갚자 싶었다.
캐나다인데요, 한국입니다.
언어가 안 되니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삶은 한국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을 하고 집에 와서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친해진 한국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도 워킹홀리데이 갈 수 있다고 했던 건가?
그래도 그런 삶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영어야 계속 공부하다 보면 늘 것이고 영어를 못한다고 풀이 죽어서 매일 우울하게 보내는 것 보다야 캐나다에서 한국처럼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