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 도착 후 하기 하는 사람들 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심칩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혹여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발에 치일까 밟힐까 노심초사하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기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사람들이 짐을 내리느라 복도에 길게 늘어진 줄에 틈이 생겼고 그때를 기회 삼아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무사히 유심칩을 되찾아왔다. 휴우.
그러나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여전히 끝이 아니었다.비행기에서 잘 내리기만 하면 꼭 꽃길이라도 펼쳐져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크나큰 오산이었다. 어찌 내리긴 내렸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길도 몰랐고 낯선 환경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큼성큼 앞서 걷는 사람들 뒤를 따라 걸었다. 그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가도 가도 끝이 없네, 도대체 출구가 어디야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저 멀리 두어 명의 공항 보안요원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방금 에어캐나다를 타고 온 사람들에게서 자가격리 계획서를 받아 1차적으로 확인을 하는 듯했다.
아, 첫 번째 관문인가? 이건 뭐 퀘스트를 깨는 것도 아니고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하나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나는 손에 꼭 쥐고 있는 자가격리 계획서를 더 꾸깃하게 쥐었다. 최대한 무해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눈을 더 동그랗게 뜬 후 보안요원에게 다가갔다. 분명 대충 쓰긴 했지만 맞는 칸에 맞는 말을 썼고 크게 문제는 안 되겠지 싶었다. 마침내 나는 보안요원 앞에 섰다. 그들의 뒤로는 작은 테이블 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비행기에서 내린 몇몇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자가격리 계획서를 본 보안요원은 내게 무어라 짧게 말하곤 검지 손가락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다시 쓰라는 말인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나는 눈치껏 새 자가격리 계획서 종이를 가져와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써도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생각이 안 날 수록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때도 어김없이 애꿎은 머리카락은 쥐어뜯고 있었고 타이밍 좋게 딱 아까 그 보안요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곤란해 보이는 나에게 다시 다가와 "너 이걸 왜 다시 쓰고 있어?"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관에 봉착해 갑자기 영어 리스닝 실력이 일시적으로 좋아지기라도 했나. 아무튼. 그는 내가 대답을 못하자 내 자가격리 계획서에 비어있는 서명란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Signature" 했다.
한숨이 푹 나오면서 허탈해졌다. 내가 지금 Signature 을 못 알아들은 거야? 얼마나 긴장했으면 이걸 못 알아듣나. 진짜 스스로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지 또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자괴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것이 무색하게 대충 사인을 휘갈겼더니 그 보안요원은 세상 쿨하게 나를 보내주었다. 진짜 이거였다고? 나는 앞으로 밴쿠버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명하라는 말 조차도 알아듣지 못해 이 난리인 것을.
어서 와, 입국 심사도 처음이지?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입국 심사받고 여기서 나간 후에 다시 티켓을 끊고 가야겠다 싶었다. 여전히 뭘 잘 모르는 나는 앞서 걷는 사람들을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걸었고 마침내 밴쿠버 공항의 상징이라는 것과 마주했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생각했다. 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버텨보자.
상징인지 아닌지 몰라도 밴쿠버 공항에 오면 꼭 찍는 것
그때 처음 키오스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키오스크, 키오스크 얘기만 주야장천 들었는데 그 키오스크가 이 키오스크인 줄은 몰랐지. 뭔진 몰라도 일단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키오스크 앞으로 가서 무언가를 하길래 나도 그들을 따라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언뜻 어떻게 하면 되는지 먼저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사람들이 쓴 후기에서 읽었던 것이 생각이 나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사진까지 찍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마스크를 한 상태로 엉거주춤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렇게 키오스크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면 종이 한 장이 출력되는데 그 종이를 가지고 입국 심사를 받으러 가면 된다.
어쩐지 엄청나게 순조롭다 싶었건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건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이미 줄을 섰을 때였다.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진이 없고 X 표시가 되어있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또 주위를 둘러봤지만 나만 그랬다.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벗고 찍은 사진,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그대로 하고 찍은 사진 등 사진이 아예 없는 건 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확실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고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었더라면 망설임 없이 당장 관계자에게 이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캐나다고 나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왠지 튀는 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줄을 이탈해 다시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막상 오긴 왔는데 이걸 다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시 해도 되는 건 맞는 건가? 한참을 고민했던 터라 이미 키오스크 쪽에는 아무도 없었고 왠지 이곳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을 것 같은 관계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만 한국과 비교가 되는지 분명 한국이었다면 여기에 누군가 서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내가 영 운이 없는 편은 아닌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가는 관계자가 보였고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으므로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Excuse me!" 세상 절박한 내 부름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인데 입은 마음대로 움직였다.
"Is this picture okay?"
나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X 표시가 된 종이를 가리켰고 그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이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 됐다 됐어! 이후 다시 줄을 서기 위해 갔을 때는 이미 줄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인어공주거든요.
보통 때의 나였다면 손발이 달달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나고 난리도 아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눈꺼풀이 쑥 들어가고 볼은 푹 파여서 누가 봐도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그저 먼저 입국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무미건조하게 쓱 훑을 뿐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들고 있던 서류파일을 다짜고짜 심사관에게 내밀었고 그도 얼결에 건네받았다. 이것저것 보던 그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멈칫했던 것 같다.
"밴쿠버에 처음 왔어?"
첫 질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의 말을 알아들었고 제대로 이해했다. 그렇다고 신이 나서 금방 멘탈을 회복할 상태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접착제로 입을 붙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에 말을 하고자 할 의지도 없었지만 말을 할 수 있는 힘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캐나다 입국 심사는 정말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해야 하는 자리라 오기 전에 제일 걱정했던 문제였는데 막상 그 문제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해탈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래,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을 할 의욕이 없으니 고갯짓이라도 하자. 나는 그의 눈을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언의 Yes 였다.
"공부하러 왔어?"
두 번째 질문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실 오직 공부를 하러 온 것은 아니고 일을 하러 온 김에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할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잠깐, 나 이러면 안 되는 건가? 그때 다시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동공이 다시 빛을 찾고 열심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가 처음 내게 건네받았던 서류파일을 다시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그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니 그는 손짓으로 출구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가장 큰 문제일 줄 알았던 입국 심사는 그렇게 아무런 문제도 없이 손쉽게 끝이 났다.
워킹홀리데이 왜 왔어요?
하머 터면 수화물도 찾지 않고 곧장 출구로 나갈 뻔했다. 이런 것도 해봤어야 알지. 다행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뭘 하는 곳인가 궁금해서 기웃거리다가 수화물을 찾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내가 안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에 사람들도 적었고 짐의 수도 적어 내 짐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건 좋은 건가? 나는 급기야 최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같은 것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내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면 좋긴 뭐가 좋냐며 의도한 것도 아니지 않냐고 한소리를 들었을 게 뻔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찾은 짐을 들고 출구로 향하던 중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뭔가 빼먹은 기분. 분명 이게 끝이 아닐 텐데 그동안 읽었던 워홀 후기에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밴쿠버에 도착해서 주면 줬지 뭘 받은 적이 없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정말 공항 내에 있는 사람들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시선이 멈춘 곳은 아까 입국 심사를 받은 곳 바로 뒤에 있는 이미그레이션이었다. 그 앞에는 캐리어들이 세워져 있었고 딱 마침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 둘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단번에 촉이 왔다. 저기 가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구나.
그 안은 너무나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모든 직원이 일을 보고 있었고 한 사람당 할애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나는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자리에 앉아 다시 내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직원 중 가장 덜 무서워 보이는 직원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던 직원이 다음 순서였던 나를 불렀다. 나는 이번에는 절대 영어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엉거주춤 그에게로 걸어갔다. 잘 듣고 잘 말하리라 결심은 했지만 기왕이면 아까 입국 심사 때처럼 간단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다짜고짜 서류파일을 건넸다. 그는 일단 서류파일을 건네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를 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와리가리슐리슐라 뭐 대충 이렇게 들렸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들은 척 For work 만 반복해서 말했다. 역시나 알아듣지를 못했으니 알맞은 답을 했을 리가 없다. 그는 몇 번이나 재차 내게 같은 질문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계속 For work 라고 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상당히 답답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정확히 딱 한 박자 쉬고는 "워킹홀리데이 왜 왔어요?" 라고 또박또박 한국어로 내게 물었다.
낯선 땅에서 듣는 한국어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전개에 긴장이 탁 풀렸다. 덩치 큰 흑인 남자가 그것도 이미그레이션에서 한국어를 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나만 생각 못 했어? 어찌 됐건 내가 영어를 못해서 생긴 일이라 한편으로는 굉장히 부끄러운 경험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일하러 왔어요!"
꿀 먹은 벙어리인 줄 알았던 내 말문이 트인 건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그는 간단한 한국어를 말할 수 있었을 뿐 알아듣진 못했고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린 터라 "I came here for work" 같은 쉬운 문장을 만들어 뱉어낼 수 있었다. 이후 잡 오퍼를 보여달라는 그에게 내가 건네주었던 서류파일을 가리켰고 그가 급하게 "어디?" 라고 했을 땐 귀여움에 웃기까지 했다. 이후 그와 어디서 일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스시를 좋아하냐 등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가 나에게 줄 것을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아주 잠깐 동안 그를 기다리며 서서 그래도 하늘이 무심한 건 아니라며 날뛰는 심장을 달래고 있을 때 그가 나의 비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드디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탓에 속이 상했던 일, 수도 없이 자책했던 일, 고구마를 우유 없이 냅다 삼킨 것 마냥 답답한 일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캐나다에 왔다. 이제 막 이번 생의 두 번째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