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기대'가 죽어야 한다
하루는 따릉이를 타고 길을 가던 때였다.
운전이든 자전거든 무조건 안전운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날도 무엇이든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약 50m 앞을 주시하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속도대로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사거리가 나왔고 잠시만 기다리면 사거리 전체가 보행자 신호로 바뀌는 곳이었기에 진작부터 속도를 낮춰가며 슬금슬금 횡단보도 앞으로 가서 자전거를 세웠다.
속도를 줄이면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던 사람이 있었는데 한 성인 여성이었다. 가까이 와서야 그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면 한 조그만 아이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 여성을 엄마로 따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대화 내용이 심상찮았다. 엄마가 그랬다. "따라올 거면 조용히 따라와!" 그렇게 공격적인 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힘을 실어서 뱉은 말이었다. 침착하게 들리긴 했지만 안에 감정이 눌려있었다. 그 말에 아이는 대꾸를 했는데, 첫 말만 기억이 난다. "왜 ~!#%@ 해서 @#$%! 하냐고!" 많으면 한 초등학생? 그렇지만 떼쓰는 거 보니 일곱 살, 아니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는 모양새였다. 아이는 거의 울부짖으며 엄마에게 소리치고 있었는데, 초등학생이든 유치원생이든 상대방에게 '왜 이렇게 해서 이러저러하게 만드냐'는 말을 잘하지는 않잖아? 글쎄, 또래 중에 어떤 아이들은 말을 너무 잘한다고 했다. 그런 애도 있다고.. 혹시 그런 애일까? 뭔가 자기가 느낀 억울한 마음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반면 엄마는 많이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대화가 귀에 슬며시 흘러 들어올 때쯤, 보행자 신호가 열리는 바람에 그들도 길을 건너고 나도 길을 건너느라 이야기의 진행은 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말을 또박또박 잘해가며 따져서 그런지, 그게 괜히 나로 하여금 이입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엄마를 잘 따라가긴 했지만 따라가는 내내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따졌다. 그런 톤으로 "왜?"라고 묻는 아이의 말에 내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과 얼마 전에 나도 그토록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일을 한 번이 아니라 최근에 정말 많이 겪어 왔었다.
'기대'를 놓고 이야기하고 싶다. '기대'라는 건 상호작용 없이, 유대감 없이는 생기지 않는 감정이다. 일종의 소망일까? 희망을 갖는 걸까? 근데 그게 어느 대상에게 머물러서 집중되면 그게 기대가 되는 거 같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할 거다. 내가 정의하는 건 그저 주관적인 관념일 뿐.
기대라는 건 마치 내가 어떤 일의 주체인 것 같이 만들어 준다. 하지만 내가 주체가 아니다. 내가 어떤 일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 기대한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로 이루어졌을 때, 구체화된다거나 현실이 되는 경험들을 몇 번이라도 하게 되면 그런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그 이루어진 일들의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쉽게 말하면 '내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거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기대'를 했을 때 일어난 긍정적인 결말들, 좋은 기억들 때문에 '내 뜻대로 된 것처럼(내가 바란대로 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거다.
기대는 현실과 떼어놓을 수 없다. 반대이기 때문에 떼어놓을 수 없는 거다. 현실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 많은 요소들 조건들에 의해 현실은 계속해서 바뀌고 변수가 생기는데, 내가 기대감을 가져 현실에 무엇인가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기대=현실'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 내가 일의 주체가 아니라는 거다. 쉽게 말해서 현실은 현실일 뿐, '모든 게 기대한 대로 될 리 없다'는 거다. 기대는 꿈일 뿐이다. 현실은 현실대로 흘러가지만 기대는 그 위에 얹어져 있는 것. 지레짐작으로 기대할 수도 있고, 절박한 마음에서 조마조마 가슴 졸여가며 하는 기대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기대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위에서 말한 아이도 뭐가 되었든 엄마에게 기대하는 게 있었던 거 같다. 아이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긴 했는데 그렇게 못해서 아쉽다. 나 또한 기대했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철저히 '혼자'인 기분이지만, 하나 분명한 건 기대를 안 하게 됐다는 거다. '기대할 놈 하나도 없어! 그건 당연한 거야. 어차피 세상은 혼자야'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사회생활하며 만난 사람들, 친한 대학 동기나 오랜 친구들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일을 이야기하는 거다.
아마 가족들에게 배신감이나 큰 실망감을 겪어본 사람은 정말 많을 거다. 말은 안 해도, 그런 일 전혀 없이 살아온 것 같은 사람들도 그런 일들을 정말 많이 겪었을 거다. 단순히 가족 욕을 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대에 대해서 쓰고 싶은 거다.
기대는 영혼을 좀먹는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난 매우 독립적인 사람이다. 뭘 하든 혼자 해도 상관없고, 정말 가끔 가다 '이런 건 누구든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하는 일들을 마주한다. 정말 특별한 일 빼고는 도움 요청할 일이 없을 정도라고 해두면 될 거 같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에게 갖는 기대는 정말 하찮은 것들이다. 정말 기본적인 것들. '그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이것만은 지켜줄래?' 하는 것이 나에게 있다. 예를 들면 같이 마주 보고 밥 먹을 땐 폰 안 보기, 배달음식 먹고 나온 일회용기들은 그때그때 치우기, 밥 먹은 그릇 물에 담가놓기 등 뭐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더 이상의 바라는 바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아무 때에나 들이대지는 않는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기에 '기본적인' 것들도 안된다면 힘든 게 당연한 거 같다. 첨에는 '이걸 안 한다고?'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와 정말 사람이 기본이 안되어있네'하고 분노로 변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건 그나마 여차저차 얼레벌레 넘어가질 수는 있다.
중요한 건 '가족이니까 나 자체를 인정해 주겠지' 하는 기대가 제일 큰 문제라는 거다. 난 여기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도 던졌다.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를 인정하거나 존중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설령 잘못을 했다고 해도 존중하며 침착하게 대응해 주는 모습을 개인적으로 가족들 안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했으면 무조건 윽박지르고 내쳐야지 되는 게 우리 가족이었다. 물론 옛날에 비해서 많이 좋아졌다. 가족들도 나이가 들고나니 안 보이던 것들도 보이고 이해가 안 가던 것들도 이해가 가기 시작하니까 충돌 횟수는 잦아들고 서로 더 이해해 보려고 늘 노력하는 자세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윽박지르고 까내리고 내치는 소통문화가 있는 한 결코 가족에게서 조차 존중받을 수 없음을 얼마 전에 다시 경험했다.
그 아이는 왜 그토록 울부짖었을까? 나는 통곡을 해가며 자기를 어필하는 아이의 심정에 내가 생각한 거보다도 깊이 공감한 거 같다. 내 인생 전반에 걸쳐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도, 듣고 함께 생각하려는 사람도, 같이 고민해 줄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였다.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니 나는 괴로웠을 거고.. 그래서 반대로 내가 더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고 같이 생각했고 같은 마음으로 고민해주려고 했나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아픔을 누군가 똑같이 겪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인 거 같다. 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 아픈 친구, 가난한 사람, 외로운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었는데, 근데 알고 보니 그건 모두 나의 필요였던 거다.
정답을 알면서도 여전히 의문인 게 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기대를 하게 되었을까?', '왜 굳이 기대를 하게 되는 걸까?', '왜 기대를 안 하려고 해도 기대를 하게 되는 구조인 걸까?' 어쩔 수가 없는 거 아닐까? 존재 자체가 기대인 것을.. 부모에게 자식이 의지하는 거 당연하고, 자식으로서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어른에게 무언가 터놓고 조언을 구하는 것도 당연한데, 그렇다고 떵떵거리며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난 정말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인드 속에 떠오른 그 어느 키워드에 대한 어른들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부모였다. 대화를 하던 중에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고, 그걸 교육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건 이해한다. 하지만 차분한 자세로 안될 건 '안된다', 잘못 생각하는 건 '잘못된 거다', 앞으로 했으면 하는 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는 죽어도 되지 않았다. 그저 잘못한 것을 거세게 물고 늘어졌고 그 외에 것들까지 다 끄집어내서 내치고 또 내쳤다. 하나에 꽂혀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니 걱정하실까 봐 굳이 부모에게 공유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싸잡아서 욕을 했다. 도통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나를 잘못 이해하셨기에 이러이러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을 갖고 고집부리고 자기주장만 한다고 윽박질렀고, 나는 그렇게 '부모도 안 가리고 지 주장만 해대는 싸가지 없는 놈'으로 변해버렸다.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부모로 인정 안 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 말은 꺼낸 적도, 생각한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무엇을 더 기대할까? 다른 도움은 필요 없었다. 금전적으로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오로지 내가 알고 있는 거,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조언을 얻고, 혹시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길 바랐을 뿐이다. 정서적인 서포트와 삶의 지혜와 나는 갖지 못한 깊이 있는 시각의 도움을 구했을 뿐이다. 근데 내 나름 열심히 살고, 해야 할 일을 부지런하게,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찾아 했던 것들까지, 싫어도 해야 한다 생각하고 이 악물고 견뎌왔던 것들까지 싹 매도당했고, 그 순간 나는 절대로 여기서, 특히 이 사람 앞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인정은 물론 '딸'로서도 인정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물론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슬픈 건, 이게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때도 그렇게 큰 충격은 없었다. 열을 많이, 아주 많이 받았을 뿐, 감사하게도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해에 오해를 거듭 쌓아가며 억울하고 분해서 몇 방울 떨군 눈물도 한 번 쓱 닦고 나니 오히려 눈은 더 말똥말똥해졌고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맑은 상태가 되었다.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는 이제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특정 명칭을 안 쓰기로 했다. 의미가 없었다. 굳이 그 명칭으로 부르지 않아도 이제는 그 사람을 부를 명칭이 많아졌기 때문에 애쓰지 않아도 됐다. 아무리 울어도 부모가 돌아보지 않는 아기는 울다 울다 더 이상 울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런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울어봐야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게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제는 우는 게 손해인 상황이 됐다. 내가 독립적인 성향을 점차 갖춰온 것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실 도움 청하는 게 민망할 지경이다. 어차피 거절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응답조차 받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 물론 사회생활은 문제없다. 사회생활과 개인적인 깊은 인간관계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간다.
기대감이 없어지니 나쁜 버릇이 하나가 더 따라온다. 상대방도 나에게 뭔가 바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나는 너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기대는 안 했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이 이제는 속에 꽉 차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때에 내게 필요를 묻는 사람은 '나를 동정하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불쾌감도 따라온다. (물론 이것도 사회생활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이런 상태가 내 심리 상태에서 큰 공간을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거 같다. 이렇게 보니 이제는 진짜로 아픈 게 맞는 거 같다. 마음이 아파도 많이 아픈 거다. 알아서 혼자가 되기로 내 마음도 단단히 결심한 것처럼, 이제는 버리기로 결심한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접근해 올 거 같으면 그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게 만든다.
그래도 사람이 참 우습다. 단 한 가지 기대가 내 안에 아직 남아있다. 언젠가 이런 아픔의 굴레를 벗게 도와줄만한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그런 기대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과 더 깊이 못 만나는 거 같기도 하다. '혼자가 편하다'는 핑계는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빙산의 일각은 핑계로 봐도 된다. 하지만 그 핑계가 나오는 심리 구조는 정말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눈만 높인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다. 데인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기준들이 죄다 자잘한 것들 뿐이다. 자잘한 것에서 기준이 많아지고 까다로워지니까 아무도 눈에 안 드는 거다. 괜찮다. 만약 그렇게 가야 한다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거다. 익숙한 데서 그렇게 저렇게 살면서, 반면 나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들,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을 따라 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해는 없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 많이 밝은 사람이다. 딱 봐도 둥글둥글한 이미지라 주변 사람들도 나를 많이들 좋게 봐줘서 너무 감사한 사람이다. 내가 마음이 이토록 아픈 상태에서도 밝게 살 수 있는 건, 이걸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인 것도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기대'에 관련해서 겪은 아픈 경험 때문에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선 오히려 태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기대를 안 하는데 사회생활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겐 기대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어쩌면 더 쿨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러나저러나 이점은 있는 거 같다. 다만 다시는 멘탈 나갈만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나도 더 이상 구하지 않을 것이고, 기대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 내 기대 탓이라고 하기로 했다. 나아지지는 않을 걸 안다.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아지는 게 아니라 슬금슬금 묻히고 있었던 거지.. 나아질 길은 이미 없었다. 사람이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기대하면 바보다.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내 MBTI는 F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23. 10. 27. fri / '기대'가 죽어야 한다_마음이 아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