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의 여성 작가의 책 | 구의 증명 (최진영)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p.94)
응. 잘 잡아먹는 게 능력이라고 가르치고.
후회한다면, 힘이 세지 않은 걸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고. (p.170)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멤버가 이 책을 읽었다기에 한번 읽어볼까,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았다. 도서관에 책이 있기는 했는데, 책을 예약한 사람의 숫자가 두 자리에 가까웠다. 책을 예약해 놓고 나서 예약했다는 사실도 잊을 때 즈음 받아든 책은 생각보다 얇고, 빠르게 읽혔다. 빠르게 읽힌다 해서 내용까지 경쾌하지는 않았다. 주인공인 ‘구’와 ‘담’의 자칫 뻔해질 뻔한 사랑 이야기가 엽기적이고 충격적인(혹은 엽기적이라 충격적인) 이야기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작품이 ‘식인’을 다루고 있어서일 것이다.
‘식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는 거부감을 준다. 아마 사회적으로 학습된 바가 있어서 그럴 테다. 연인이었던 ‘구’가 사망한 뒤, ‘담’은 구를 먹기 시작한다. 머리, 피부, 성기까지 모조리 다. 그것은 엽기적이고 잔인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회가 구에게 가했던 폭력만큼 잔인한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구가 그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된 원인은 타고난 가난에 이자가 붙듯 불어나기만 하는 가난 때문이었으니까.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지만 구는 빈곤의 굴레를 탈출할 수 없었고, 사회는 어린 구에게 가혹했다. 구는 착취당하고 또 착취당한 끝에 결국, 죽음이라는 결말-이자 책에서는 시작-을 맞이한다. 독자는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진정으로 잔혹한 것은 담인지, 사회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작가가 설명하기로,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은 “담은 구를 먹으면 피와 살이 되니 오래 살 수 있고, 자신 안에 구를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먹으면서 구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라고. 작가의 해석을 들으니 성경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그것에 더해 구 또한 생애 내내 자신을 증명하려 애썼으나-사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곧 그 인간의 증명임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실패했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것은 내용을 떠나 이 책이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나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현상을 “마치 과거의 별빛이 현재 제 눈에 담기는 것처럼, 제가 과거에 쓴 글을 독자는 현재의 글처럼 만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또한 ‘“구의 증명”은 좀 더 멀리 있는 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메시지가 지금의 독자들에게 간절하게 느껴졌던 메시지였던 건 아닐까 싶다. 살아만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 증명인데, 개인이 자신의 효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지금.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얼마나 그럴싸한 삶을 사는지 SNS로 증명해야 하는 지금이야말로 이 책이라는 별이 유독 빛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