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성작가의 책|여전히 미쳐있는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우리 중 누구도 학부나 대학원에서 여자 교수에게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페미니즘의 관점을 인문학에 통합하려는 바로 그 시기에 있었다. 여성사나 여성문학사 분야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인류학, 종교학, 심리학, 예술, 사회학, 법학, 인종 연구, 경영학, 자연과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다만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회운동에서도 일어나는 법이다. 조용히 정지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기도 사실은 도전 의식을 북돋우며 미래에 필요한 전술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똑같은 깨달음을 체험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똑같은 주석을 달고, 똑같은 연구 주제로 되돌아가고, 똑같은 정서적 진실을 다시 배우고, 똑같은 책을 거듭해서 쓰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그 사람이 어리석거나 고집스럽거나 변화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같은 일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삶의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쳐있는”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올 게 왔구나’ 싶었다. 2022년, 몇 달에 걸쳐 독서 모임 친구들과 함께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전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완독했다. 그런데 그 저자들이 이번에는 19세기가 아닌, 1950년대부터 현재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고? 그게 출간되었다고? 심지어 전작보다는 얇은 편이지만 여전히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고? 절대 혼자 읽을 책은 아니다 싶었다. 독서모임 친구들과 함께 펼친 “여전히 미쳐있는”은 ‘여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했지만, 전작과는 사뭇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은 전작이 작가별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1950년대부터 2020년대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구성되었다. 1950년대를 다룬 1부부터, 한 부씩 60년대, 70년대, 80‧90년대, 21세기까지 총 5부까지 있다. 각 부에서 시대적 배경 및 그에 따라 변화한 페미니즘의 양상과 그 시대에 활약했던 여성 작가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여성 인물을 소개한다. (21세기를 다룬 5부에서는 무려 비욘세도 등장한다) 수전 손택처럼 친숙한 이름도 있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다. 한 사람에 관해 깊게 다루기보다 여러 사람을 등장시키는 방식을 택했기에,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곧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19세기의 주요한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며 페미니즘 비평이란 길을 열었다면, “여전히 미쳐있는”은 그보다 문학 작품 해석의 비중이 적은 편이다. 전작은 고전 작품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석과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저자들의 새로운 시선이 반가웠는데, 이번 책은 그보다는 더 많은 작가나 인물을 다루는 데 집중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책이 저자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다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저자들은 이 시대를 직접 겪었고,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으니 직접 경험한 이의 감정까지 전달받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들과 동시대를 산 전우들에 대한 회고에 가깝다. 그러한 회고를 읽으며 저자를 비롯해 많은 여성이 여전히 미쳐있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체감하게 된다. 페미니즘이 확산할수록 그에 반하는 움직임 또한 끊임없었다는 것을 역사로서 알게 된다. 하지만 이는 곧 희망이 되기도 하는데, 희망 역시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저자가 기록한 역사로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계속되었고 그 증인은 곧 저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