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읽고 싶은 책 | 조지 오웰 산문선 (조지 오웰)
물론 우리는 불만을 가져야 하고, 잘못된 일을 최대한 좋게 바라볼 방법을 찾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모두 없앤다면, 우리를 위해 어떤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봄이 돌아오는 것을 인간이 즐길 수 없다면, 노동이 줄어든 유토피아에서 어떻게 행복을 찾을 것인가? 기계가 만들어 준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중략)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나무와 물고기, 나비 그리고 — 첫 번째 예로 돌아가 — 두꺼비에게 느꼈던 사랑을 간직함으로써 조금 더 평화롭고 즐거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철과 콘크리트를 제외한 그 무엇에도 감탄하면 안 된다는 교리가 설파된다면 인간이 남아도는 에너지를 배출할 출구는 오로지 증오와 지도자 숭배밖에 남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두꺼비에 대한 단상’ 중)
소년지는 열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영국 소년의 많은 수가, 어쩌면 과반수가 읽는 잡지인데, 그중에는 신문 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년들은 이러한 잡지를 읽으면서 보수당 중앙 사무실에서도 지나치게 구식이라고 여길 만한 생각을 흡수한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은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존재하지 않고,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전혀 잘못되지 않았으며, 외국인은 하찮고 우스운 존재이고, 대영 제국은 영원히 지속되 일종의 자선 사업 같은 것이라는 확신이 주입된다. 이러한 잡지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이 현상이 의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소년 주간지’ 중)
보통 과거가 현재보다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느껴진다면 과거를 돌아볼 때는 몇 년씩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일들이 한꺼번에 압축되어 보이기 때문이고, 또 우리에게 떠오르는 기억 중에 정말 순수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중)
‘조지 오웰’ 하면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본 소설이 떠오를 것이다. 그의 작품인 “동물농장”과 “1984”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이다. 특히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라는 용어가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을 만큼 조지 오웰의 소설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처음 읽어본 그의 산문 역시 소설과 공통점이 있었다. ‘잘 쓰인 글’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담아낸다는 점이었다.
조지 오웰 산문선은 약 80여 년 전 글의 모음집이다.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단지 그 시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현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싶은 내용이 담겨있다. 앞서 언급했던 “동물농장”이나 “1984” 역시 여전히 사랑받고 읽히는 이유가 지금 현 상황에서도 유효한 이야기라서는 아닐까.
오웰이 묘사한 1940년대, 보수화된 소년지를 읽으며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체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현재 유튜브나 SNS로 혐오를 배우는 아이들(사실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넘어 마치 미래를 예측한 듯한 그의 통찰은 21세기의 독자에게도 놀랍다. 동시에 씁쓸하기도 하다. 과연 오웰은 시간이 이렇게 흘렀음에도 여전히 변치 않은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몇십 년이나 흐른 미래가 자신이 비판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
오웰의 산문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진솔하고 명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한다. 그는 ‘정치와 영어’라는 글에서 글을 쓸 때의 원칙을 여섯 가지 정도로 얘기하는데, 왜 그의 글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 글에서 자주 본 은유, 직유, 기타 비유적 표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 짧은 단어로 충분할 때는 긴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3. 어떤 단어를 뺄 수 있을 때는 항상 뺀다.
4. 능동태를 쓸 수 있을 때는 수동태를 절대 쓰지 않는다.
5. 같은 뜻의 일상 영어가 생각나면 외래어 문구, 과학 용어, 전문 용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6. 아주 상스러운 말을 하느니 차라리 위의 원칙을 어긴다. (’정치와 영어’ 중)
그는 길게 말하는 것보다 짧게 말하고, 대신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수많은 식민 지배를 했던 영국의 백인 남성으로 태어나, 식민지 경찰을 지내며 식민 지배의 현실을 목도한다. 그를 계기로 그는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또한 실제로 영국의 빈곤층 생활을 직접 살아내며 그것 역시 글로 남겼다. 말로 무언가 하기는 쉬워도 행동은 어렵다. 충분히 출신의 이점을 누리며 ‘대영 제국’에 감정 이입했을 법도 한데, 그는 멀리서 자신의 위치를 바라보며 반성하는 것을 택했다. 그 용감한 선택 때문인지 우리는 여전히 그의 글을 읽으며 여전히 분노할 것이 많은 세상에 뜨겁게 타오르기도 하고, 이성을 벼리며 차갑게 가라앉기도 한다. 좋은 글이란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 곁에 살아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