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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석 Jul 21. 2023

명검이 되고 싶어요.

신천역 네잎클로버 할아버지

 저의 첫 글은 약 10여 년 전 제가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 합니다. 


 그 시절 저는 배우라고 얘기하긴 부끄럽고 배우 지망생이었다고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연기 스터디를 하고 뮤지컬 오디션에 대비해서 노래 연습을 하고 평소엔 부지런히 알바를 하고 보통의 배우 지망생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료 한 명이 곧 대형 뮤지컬 오디션이 있을 예정이니 함께 지원해 보자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춤 실력도 노래 실력도 부족했지만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기에 작은 역할이라도 따내고 싶어 해당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했습니다. 


 오디션 당일 저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습니다. 대략 50여 명 정도 되는 지원자들이 안무 선생님이 알려준 안무를 현장에서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프로처럼 턴을 돌고 안무를 훌륭히 따라 하는 지원자들이 제 눈에는 모두 프로처럼 보였습니다. 반면에 저는 그런 오디션 현장이 처음이었고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 타임 지원자들의 순서가 끝나고 제가 볼 순서가 되자 새로운 수십여 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저는 현장에서 안무를 배웠고 약 10여 분간 연습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투턴을 제대로 돌 줄 몰랐고 어려운 안무를 배우는 것도 처음인지라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쪽 구석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안무 연습을 했습니다. 잠시 후 오디션 장으로 들어가서 지정 안무와 노래를 부르고 나온 저는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무리한 탓에 허리에 통증이 왔고 다리는 후들거렸습니다. 현장에서 불러주는 2차 합격자 명단에 당연히 저는 없었고 조용히 짐을 챙겨 현장을 나왔습니다. 3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절뚝거리며 내려온 기억이 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저는 오후 알바를 가야 했기에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허리 통증이 계속 느껴져서 어디 찜질방이라도 들러 잠시 쉬었다 가야 하나.. 싶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알바 시간도 촉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발걸음을 전철역으로 옮겼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허리가 아파 신천역 지하철 계단을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갔던 기억이. 아래까지 내려와서 코너를 돌아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코너 한편에 한 할아버지께서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팔고 계셨습니다. 지나치며 얼핏 보기로는 네잎클로버를 코팅해서 팔고 계셨습니다. '네잎클로버? 뭐지?..' 하는 생각에 다시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다양한 네잎클로버를 팔고 계셨고 매직으로 박스에 적혀있기를 '상태 좋은 놈 2천 원, 보통 놈 1천 원'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네잎클로버들을 바라보다 오늘 오디션도 떨어졌는데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하나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허리를 굽혀 네잎클로버를 자세히 보다가 


    나               상태 좋은 놈으로 하나 주세요. 

    할아버지     예. 상태 좋은 놈으로~ 봅시다. 

    나               어떤 게 제일 운이 좋을라나..

    할아버지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봐요?


 혼잣말을 하던 저에게 할아버지는 영차~ 하고 일어서시며 말을 거셨습니다. 키가 아주 작은할아버지셨습니다. 저는 제가 오디션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설명드리고 결과가 좋지 않아 행운을 좀 가져보고자 네잎클로버를 사려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내가 얘기하나 해줄까요?

    나               얘기요? 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6시 반부터 야간상담 근무라서.. 지금 거의 바로 출발을 해야 딱 맞는 시간이라..

    할아버지    금방 하는데요 뭐. 몇 분 안 걸려요. 


저는 할아버지 얼굴을 한번 보고 다시 한번 휴대폰을 보다가 허리를 쭉 펴며 말했습니다. 


    나               예, 뭐.. 뭔데요? 짧게 예. 한번. 

    할아버지    자전거 탈 줄 압니까?

    나               자전거요?


저는 속으로 '또 무슨 꼰대 같은 얘기를 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큰 내색 않고 말했습니다. 


    나               예. 탈 줄 알죠.

    할아버지    자전거 타고 골목 요리조리 지나갈 수 있어요?


잠시 생각하다가


    나               그럼요. 뭐.. 충분히 갈 수 있죠. 요리조리. 

    할아버지    그러면 자전거 뒤에 20kg짜리 쌀가마니 세 개 싣고도 요리조리 갈 수 있어요? 빠르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저는 말문이 잠시 막혔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               어.. 쌀가마니 세 개 싣고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뭐 조심히 가면 충분히.. 빠르게는 못 가죠. 빠르게는.

    할아버지    자전거를 탄다고 해서 다 잘 타는 게 아니에요. 그냥 타는 거는 누구나 다 타지만, 진짜 전문가들은 짐을 많이 싣고 빠르게 휙휙 가도 안 넘어져요.

    나              (피식 웃으며) 그렇죠. 당연히.

    할아버지    (아랑곳 않고) 근데 이제 막 배웠거나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무거운 짐을 싣고 달리면 분명히 넘어져요. 천천히 조심히 갈 수는 있어도 빠르게 방향 바꾸고 휙휙 못 탄다니까요. 안 돼요. 절대.

    나               안되죠. 당연히. 그리고 저는 자전거를 잘 안 타는데요.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 지금 학생한테 해주는 얘기가 뭐냐면.

    나               (핸드폰을 보며) 저 이제 진짜 가야 됩니다. 할아버지, 일단 2천 원 받으시고요. 저 이걸로 할게요.

 

 저는 알바를 갈 시간이 다 되어 상태 좋은 네잎클로버 하나 챙기면서 돈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돈을 받자마자 저를 쳐다보며 얘기를 이어가셨습니다. 


    할아버지    본인이 쇠예요. 쇠. 대장간에 칼 만드는 쇠.

    나               (한숨 섞인) 예. 쇠. 쇱니다. 

    할아버지    본인은 명검이 되고 싶어요? 부엌칼이 되고 싶어요?


저는 계속 뻔한 얘기를 하시는 할아버지에게 답답해하며 대답했습니다.


    나               명검이 되고 싶죠~! 당연히!

    할아버지    (단호하게) 그러면 담금질을 더 해야지요!!

    나               언제까지 합니까? 담금질을요~! 제가 지금 부산에서 올라와서 참나.. 몇 년째 지금..


저는 답답한 마음에 조금 목소리가 커지며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그걸 왜 본인이 판단합니까?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나               예?

    할아버지    그걸 왜 본인이 판단하냐고요?

    나               그거야 제가 담금질을 하는 당사자니까..


할아버지는 허리띠를 야무지게 끌어올리시고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사람들이 진주를 캐고 싶어서 막 뻘밭에 가서 찾고 그러죠? 예? 진주 혼자서 그냥 튀어나오거나 하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잖아요. 진주를.

    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죠.

    할아버지    본인이 명검이 돼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다 찾아줄 건데, 그걸 왜 본인이 판단을 하냐고요. 본인은 그냥 계속 담금질 열심히 하고 있으면 돼요. 

    나               아니, 계속하고 있는데 안되니까..

    할아버지    (확고하게) 에이! 더해야지! 더해야 돼요. 한참 하다가 딱 돼있으면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가만 안 놔둔다니까 사람들이. 내가 보니까 더 해야 돼요. 

    나               아.. 할아버지가 보시기예요?

    할아버지    그럼! 계속해요. 더. 명검 되고 싶으면. 

    나               (수긍하며) 예.. 계속해야지요. 명검이 돼야 안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안 늦었어요?


저는 아차! 하며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나               10분 늦었습니다. 

    할아버지    얼른 가요. 얼른. 

    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허리랑 다리 때문에 빨리 못 갑니다. (손 위의 네잎클로버를 보며) 담금질.. 맞습니다. 사장님. 담금질..


 저는 할아버지께 깍듯이 인사하고 지하철 개찰구로 향했습니다. 그 이후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아픈 허리로 알바 장소에는 잘 도착했는지 그날 저녁에 얼마나 통증이 더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만난 순간부터 자전거 얘기, 진주 얘기, 담금질 얘기는 지금도 생생히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난 이듬해에 저는 대학로의 한 극단에 들어가서 10여 년간 연극을 했습니다. 연극을 하며 수많은 선배님들과 동료들을 만났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극단 대표님은 차근히 무대 경험을 쌓아가던 저에게 이따금씩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담금질을 해야 한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다 너를 찾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부지런히 무대 경험을 쌓거라.' 


 지금 저는 그때처럼 조급하지도 않고 제 실력이 안 되는 것에 무모하게 덤비지도 않습니다.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신천역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말씀이 아직까지도 제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겨 저를 응원해 주는 느낌이 듭니다. 


 여전히 저는 부엌칼보다는 명검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감사하게 삶을 살아내며 기분 좋은 담금질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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