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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디 Mar 30. 2023

산책

Aix-en-Provence, France


정오에 문을 반쯤만 열어두고서 글을 쓰다 보면 한기가 들어 곧 또 문을 닫아야 했던 계절이 지나, 날이 좋아서 카페에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공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3월, 시작의 계절이 더랬죠. 이제 학생이라는 호칭을 벗은 지 몇 해 지나 이전처럼 매해 봄에 많은 변화가 강제로 찾아오지 않는 터라 크게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눈앞의 것들을 해내며 살다 보면 나를 둘러싼 풍경을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언제 얼기 시작한 지 몰랐는데 어느 날 가보니 호수가 얼어있는 것처럼 언제나 앙상한 가지였던 것 같은 나뭇가지에는 곧 터질 듯 꽃봉오리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서둘러 피어난 동그랗고 샛노란 꽃술도 보입니다. 매해 꽃은 피고 졌을 텐데도 새삼스럽게 이런 생명력이 느껴질 때가 벅찰 만큼 좋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송이가 아니어도 그 이전과 이후까지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비로소 퇴사 후 3개월이 지났군요. 오늘의 햇살과 자연의 속도에 맞추어 잠깐 주저앉아 구경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럴 때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 같아서 허무해지기도 합니다. 무얼 위해 빠르게 살아왔는지요. 정작 원하는 것은 조금 속도를 늦추면 만날 수 있는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느리게 걷기 위해 빠르게 산다는 것이야말로 소모적인 삶이지 않을까요. 학생일 때에는 원치 않아도 매년 같은 반 친구들이 바뀌었지만 학생이 아닌 후에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누렸던 많은 특권을 떠올려봅니다.


언제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르게 하는 게 좋아서였습니다. 여행지에서 여유를 즐기기 위해 벤치에 앉았을 때, 감동을 주는 작품 앞에서 한참 동안 여운을 느끼고 싶을 때, 하염없이 쉬고 싶어 침대에서 머물 때에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언젠가는 일어서 이동해야 함을 알지만 곧 찾아올 그 시간이 아쉬울 만큼 이 순간이 좋은 겁니다. 제게는 산책이 그랬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특히 제가 좋아하는 일은 여기다, 싶을 때에 그 자리에 머물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렇게 한 곳에 가만히 있다 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변화하는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이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풀 사이로 바스락거리며 뛰어다니는 생명체(수묵화 같은 참새였습니다.), 숱이 많은 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며 내는 푸른 소리와 반사되어 비추는 빛…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이 수수한 매력은 쉽게 자극적인 욕심에 잊히곤 합니다. 조금 전에도 그랬거든요.




말을 꺼내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한 이 이야기를 왜 굳이 꺼내느냐고 묻는다면, 어렵게 추첨된 행사에서 섣불리 예약내역을 변경했다가 당첨 내역이 취소되고 만 겁니다. 당첨되었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에 믿기지 않아서 많이 들뜨고 기뻤는데 말입니다. 알림이 뜬 지 채 몇 분이 흐르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잠깐 이러면 안 되나 고민도 했지만 행동이 앞섰던 겁니다. 저지르고 나니 후회가 됐습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후회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미련을 잘 두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저는 합리화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반성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미 취소된 내역과 이미 자동으로 대기자에게 순서가 넘어갔다는 문의 결과를 받아 들고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내 욕심이 부른 결과일지도 몰라. 내게 찾아온 행운도 누군가 놓친 결과였을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내가 놓친 기회는 또 다른 누군가의 행운이 되었겠지.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겁니다. 아쉽지만 받아들일 시간입니다.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억지 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욕심이 부른 화인데 또 다른 욕심을 부리는 건 너무 고약하기 때문입니다. 놓친 것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요? 그 시간이 다른 것을 할 또 다른 가능성을 얻은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지 못한 행운이 찾아왔을 때에도 평정심을 잊지 않을 겸손함을 조금은 배웠습니다. 별일 없었던 그날의 일정이 반짝, 생겼다 없어지면서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되었고요. 단지 그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행운만 생겼다가 없어진 것일 뿐, 제 시간이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만약 들뜬 그대로 있었다면 그때부터 행사에 참여하는 그 순간까지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겁니다. 이 일이 제게 변화의 돌멩이가 되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중요한 것에 집중할 때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가려고 액셀을 밟아대도 정작 아끼는 시간은 몇 분 내외이고, 그렇게 아낀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기 쉬운 것처럼요. 빠르게 할 생각보다 제가 서있는 이 길에서 꽃도 보고 바람도 느끼며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않기로 다시 다짐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여유를 잃지 않고 부지런히 스스로를 갈고닦는 온전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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