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간 날씨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글을 쓰는 것
꾸준히 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이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하루 무리해서는 질려버릴 수도 있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를 마감할 때에 에너지가 남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체력을 소진해 버리곤 하니까요. 에너지를 잘 분배하는 일은 스스로를 잘 보살피는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요즘 제가 기르는 데이지꽃, '모어'를 틈만 나면 들여다보다 보니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보살피는 일이 이렇게나 힐링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원 가득 피어있는 꽃과 싱싱한 나무가 너무나 기특하고 신기합니다. 마른 선물봉투 안에 작은 지퍼백, 그 안에 든 깨 같은 씨들이 생명력이 '멈춤'상태일 줄 알았는데, 깨끗한 흙과 물을 듬뿍 주고 며칠을 기다리니 '일시중지' 상태였더라고요.
집안일도 꼭 해야 하는 일, 미뤄서는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를 잘 돌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서두르는 마음 없이 정성껏 하게 됩니다. 마치 문구점 주인이 물건을 틈틈이 가지런히 진열해 놓듯이요. 모든 해야 하는 일은 누군가가 정성껏 하던 일에서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는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날씨가 좋든 좋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할 일을 해야 하고, 좋은 날에는 시간을 내서 햇빛을 쫴야 합니다. 실외 마스크가 해제된 지 일 년이 더 지났고,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미세먼지가 없는 따뜻한 오늘 같은 날이면 더욱이요.
어제 아침엔 부슬비가 내렸고 아뜰리에 휴무일이라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는데, 그 기회를 틈타 2층 테라스 자리에 앉아보았더랬습니다. 볕장도 있고 하얗고 구멍이 송송 뚫린 폭이 큰 의자, 노트북을 올려두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을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 그리고 무엇보다 끝내주는 2층 뷰까지 완벽했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가 비어있을까 작은 기대를 안고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 할아버지의 낭만으로 가득했습니다. 테이블 없이 뷰만 볼 수 있는 의자 하나랑 저 구석자리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있는 그늘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기 전에 황홀하게 나부끼는 내 앞의 나무와, 그늘을 드리우는 나뭇잎을 올려다봤습니다. 성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이 꼭 어린이날처럼 맑습니다. 아아, 행복해라.
계속 떨어지는 나무 부산물들과 작은 거미, 날아오는 민들레 씨앗에 뒤덮였지만 괜찮습니다. 앉아있던 자리에 시간이 햇빛을 끌어와도 뒤돌아 앉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노래인지, 어르신분들의 취향인 뽕짝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이어폰을 꽂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제는 신난 외국인 세 분이 명랑하게 유창한 영어 수다를 떠는 것을 듣고 있다가 결국 이어폰을 꽂았는데,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아마 나는 홀로 앉아 작업을 하느라 수다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겁니다. 지금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것들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차선책이었을지는 몰라도 조금 떨어진 이 나뭇잎 그늘 자리가 썩 마음에 들어서 계속 있기로 했고, 이제는 멎은 노랫소리 대신 어르신들의 끊임없는 말소리, 그 사이로 새소리, 귀 기울이다 보면 바람의 소리도 조금 느껴집니다. 바로 뒷길에는 도로가 있어 차가 이 아름다운 공기 덩이를 가르고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고요. 잘 때에 고요함을 즐기면서도 자주 외로울 때면 조용한 강연, 라디오, 독백 같은 노래를 듣곤 하는 저는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기로 합니다.
지난주에 메이를 따라 서촌 문구 투어를 다녀온 후, 기록의 귀함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 다이어리가 두 개나 있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자축 기념이자, 좋은 공간의 기억을 품은 합리적인 미니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첫 출근이 지나도 펼치지 못한 것은 새 다이어리를 살 때의 환상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두려움에 가까웠습니다. 지금 당장 쓰지 않을 것은 치우자는 생각으로 책상을 정리하다가 결국 그저께 종이더미를 집어 들었고, 애틋한 마음으로 모아 온 스티커를 붙여 미리 망쳐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표지가 구겨지거나 닳을 걱정도 없이 에코백에 덜렁 넣어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글씨가 오락가락하고 스케줄이 좀 빈 날이 있어도 아무렴, 어때. 위클리가 왼쪽, 오른쪽 양 페이지 칸으로 나뉘어 있어 분리된 정보를 기록할 수 있습니다. 왼쪽은 작가의 삶에 필요한 것, 오른쪽은 업무와 해야 할 일을 적었습니다. 더 이상 작가의 삶이 소홀해지지 않을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 다이어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지 않아 무언가 완성될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집에 잠시 들러 노트북은 두고 책으로 바꾸어 가야겠습니다. 자연 속에서는 종이와 펜, 역시 아날로그가 제일 잘 어울립니다.
#아날로그키퍼 #석촌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