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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Sep 24. 2023

파리에서 꽃을 사다

저들도 그렇게 서로를, 하늘을, 비치고 품겠구나

    2013년 10월, 2주 일정으로 파리 여행을 갔다. 나로서는 꽤 긴 휴가를 모처럼 낸 터라 숙소와 항공편만 정한 뒤 나머지는 대충 도착해서 알아보는 평소와는 달리 꽤 정성 들여 준비했다. 테마는 '파리지앵 코스프레'. 
    파리의 숙소는 가성비가 매우 떨어진다는 파리 유학파 선배의 조언에 따라 숙소는 몇십 분 거리의 신시가지인 라데팡스로 정했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흉내를 내기 위해 주방이 딸린 방을 구했는데 숙소에 체크인하고 보니 깔끔하기는 했지만 삭막했다. 그런 공간에서 2주를 보낼 생각에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변을 파악하고 기본 생활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위해 나갔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교통편 알아보기'였다. 지하철은 정기권으로 1주일권을 19.5유로에 사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와서 물으니 그걸로는 내 숙소가 있는 지하철역에 못 온단다. 그럼 뭐를 사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의 줄은 길고, 매표원도 인내심이 이미 바닥난 듯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웬만한 데는 다 가는 걸로 달라하고 30유로를 냈는데,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도 내가 뭐를 산 건지 몰랐다. 표를 산 후 이제 어디로 가나 두리번거리는데, 2박 3일 벨기에를 다녀올 때 타야 하는 기차 브랜드를 두른 상점이 보였다. 생라자르역에 가서 사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들어가서 물어보니 직영점같이 그곳에서도 표를 판다고 했다. 오오, 이런 행운이. 그것까지 사고 나니 일단 이동에 대한 사항은 준비 완료.     


   자, 이제 해가 있을 때 장을 보자! 기본 생필품을 위해 마트를 찾았다. 호텔을 기준으로 위치를 안내받은 터라 지하철역에서부터 출발하자니 찾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찾아 들어갔다. 매대에 정리한 품이며, 물건들의 포장 디자인의 세련미에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브왈라 Voila! 다양한 치즈, 햄, 싱싱한 과일에 와인을 매대에서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토토토 타타타’이리로 저리로 뛰어다녔다. 한껏 신이 나서 저녁거리로 샐러드에 바게트까지 구입해서 숙소로 향했다. 


   이 정도면 너무 많이 안 사고 잘했어, 잘 참았어, 스스로 칭찬하며 걷는데 꽃가게가 눈에 띄었다. 번뜩, 이 여행은 '파리지앵 코스프레' 아닌가, 마치 오래 있을 사람처럼 화분을 사자고 생각했다. 양손에는 이미 짐이 잔뜩 있었지만‘화분이니 안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하며 꽃가게에 들어갔다. 무겁지 않지만 존재감 있는 꽃으로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꽃집 아저씨가 얘가 행색은 관광객인데 웬 화분을 사나 싶었는지 파리에 사느냐고 물었다. 네, 맞아요, 할까 하다 실은 잠깐 들른 건데 꽃은 내가 보다가 친구 주고 간다고 하니 뿌듯한 얼굴로 “good, good”이란다. 떠날 때까지 주고 갈 친구를 못 사귀거나 주고 가기 번거로우면 다시 드리고 갈지도 몰라요,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하.

   아저씨가 화분을 종이가방에 담아주었는데 앞면에 커다란 마름모꼴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기로 잎이 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나올 수 있었고 바람이 통했다. 식물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검은색 봉투에 마름모꼴 구멍은 붉은 테두리를 둘러 디자인이 예쁜 게 무료로 제공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방에 돌아와 꺼내려다 화분보다 봉투가 더 예뻐서 꺼내지 않고 그대로 올려 두기로 했다.      

   

    그렇게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부터는 미리 등록해둔 바스티유 거리의 화실 수업 6회와 관광객용 거리 스케치 수업 2회, 뚜벅이 파리 관광 등을 위해 파리로 매일 나갔다. 

    화실 선생님은 수채화 종이로 유명한 아르쉬 회사에서 지원받아 여행하기도 하는 실력 있는 화가였다. 여행 풍경을 수채화로 아르쉬 종이에 담으면 그걸 회사에서는 홍보 책자로 만든다고 했다. 다국적 파리지앵들이 섞였지만 기본적으로 수업은 불어로 진행되었는데, 나와의 수업만 떠듬떠듬 영어로 진행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은 향긋한 차를 금이 가고 손잡이가 깨지기도 한 머그잔에 프랑스식 쿠키와 함께 대접했다. 낡은 나무 바닥이 있고, 물감이 여기저기 묻은 화실의 공기는 느리게 흘렀다. 모델조차 남달랐는데, 미국, 한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누드 크로키 세션을 해봤지만, 파리의 모델이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답고 포즈도 다양했다. ‘역시 파리!’라고 생각했다. 

     주로 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파리지앵' 거리 스케치 수업도 들었다. 일반 회사원에서 전업한 지 5년 된 화가 선생님이었는데, 1회 수업이 화실의 6회 수업료보다 비싸서 화실 선생님에게 미안했다. 한 번은 공원에서 각자 스케치를 한 후, 하얗고 높은 천장의 채광 좋은 작업실로 가서 마무리하는 수업이었고, 한 번은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들었다.      


     탁 트인 광장 너머, 먼 끝 소실점에 파리의 개선문을 두고 마주하는 라데팡스 신개선문 Grand Arch 계단에서 느리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전면이 유리로 된 높은 빌딩들은 청명한 하늘을 거울같이 비치는 게 마치 하늘과 빌딩이 서로를 품은 것 같았다. 계단에 앉아 광장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도 그렇게 서로를, 하늘을, 비치고 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차가운 빌딩들에 순간 피가 도는 듯했다.     

    뚜벅이 파리 관광에서는 남편과 아이들을 집에 두고 혼자 여행하러 온 동갑내기 엄마를 만났다. 우리 둘은 하루동안 친구가 되어 몽마르뜨 공원, 에펠탑 등을 함께 다녔고, 그런 곳에서 만난 인연이 흔히 그렇듯, 사용하지 않을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시간이 너무 절실해서 온 여행이라고 했고, 그런 그녀를 나는 응원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은 필요한 법이고, 나 또한 부모님에게서 떨어진 내 시간이 필요해서 간 여행이었으니까.      



    2023년이다. 이번 주말, 나는 이름으로 부르는 동생의 아내, 조카‘큥’의 엄마, 예법에 맞게는 올케 되는 그녀가 파리에 간다. 한국에서 셋, 하와이에서 둘, 유럽에서 하나 출발해서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파리지앵 동창의 와이너리 winery 결혼식에 참석한단다. 일주일 휴가도 마음 편히 내기 어려운 직장에 다니는 그녀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지만, 언니 같다. 성품이 좋아 들뜬 티를 내지 못하고 직장, 남편과 아들, 부모님에게까지 여기저기 미안해하기에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럴 자격 있다고. 그녀가 여행 준비하는 걸 보며 예전에 SNS에 올렸던 글이 떠올라 찾아보다 파리에 가면 첫날에 꼭 꽃을 사라고 권했다. 나는 누구를 주고 오려고 했는데, 결국 꽃집에 다시 갖다주고 왔지만… .


    주변의 모두를 떠나 혼자 가는 ‘긴’ 여행을 처음으로 떠나는 그녀를 응원한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과 재회하고, 파리지앵의 생활을 들여다본 후 많은 이야기를 품고 돌아올 그녀를 벌써 만나고 싶다. 


[한국산문 2023.5 vol.205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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