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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r 10. 2024

고생에 대하여

근래 별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누가 얼마나 잘 지내느냐는 내용이 다수다. 유명 강사나 유명 연예인들이 한 두장으로 올리는 사진 속에서 힘들었던 경험이나 지난한 일상의 모습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그나마 너튜브는 스토리를 담아야 하니 고민을 상담하거나 고민을 상담해 주는 과정을 찾을 수 있다. 너튜브가 한창이던 때에 내가 즐겨보던 콘텐츠는 물론 고생이 담겨있는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주로 보던 내용들은 고생이 끝난 방탄소년단이 영화를 누리는 현장이거나 명품 언박싱 유튜버가 여행에서의 소비와 명품에 아낌에 돈을 쓰는 생활상이었다. 

별스타그램을 지우고, 유튜브를 끊는 오늘에 이르러 나의 결단과 변화에 스스로 칭찬하는 바이다. 덕분에 힘든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다. 이런 변화는 고생에 대한 관점의 전환으로부터 시작이다. 사실 나는 잘 참는 편이었다. 불의를 보면 불의라는 인식은 있지만 마주쳐 행동을 취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니 불합리해 보이는 현장을 발견하면 참았다. 입을 닫고 상황을 바라보며 불의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게 맞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했었다. 입을 닫은 나에게 불합리한 상황이 덮쳐오면 그 자리를 떠버렸다. 참고 피하고, 다시 시작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다 가정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기혼 여성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건 도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 안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삶은 어찌나 공평한지 숨 돌리고 나면 다시 두드려온다. 고생이 닥친다. 참고 피했던 만큼의 불의가 나를 덮치지 않는다면 나의 가족을 덮치기도 한다. 고통이 시작되는 게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선 더 물러날 곳이 없기에 힘들고 불편한 시간을 직면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가정을 지킬 수는 없다. 


아이가 변했어요라는 말은 지난 한 주간 큰 아이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아이가 내게 다가와 말을 한다. 주방에서 아이의 늦은 저녁 밤을 준비하는 나를 발견하면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려하는 눈치다. 3월 4일 고등학교로 등교하고 만 5일 만에 다른 아이가 왔나 보다 싶을 정도다. 

 아이의 침대, 핸드폰, PC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하다. 7시 20분 대치동의 학교로 출발하기 위해서 아이가 혼자 6시 30분에 일어난다. 입이 짧은 아이니 금방 지은 새 밥을 내밀어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6시에 기상을 했다. 금요일이 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방학이 몸은 더 편했구나 하고 엄살을 피워본다. 괜한 엄살이다. 몸이 피곤한 고생은 내겐 전혀 고생이 아니다. 

9시까지 자습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9시 40분이다. 아이에게 저녁밥을 차려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보면 눈이 내려앉는다. 저녁밥을 먹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맞출 수 있게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데, 피곤하다. 빨리 자야 내일도 일찍 일어날 텐데 하는 생각뿐이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서 읽은 원서 속 내용에 대한 이야기에 배고파한다. 아직 반 아이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수업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과 1년의 진행에 대한 계획을 알리는 시간이니 본격적으로 공부할 내용은 딱히 없어 보인다. 아이는 신나게 책 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걸로 보인다. 바다 건너 미국 아이비리그 교수님의 벽돌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학교에서 찾을 때까진 아이는 엄마를 토론 대상자로 삼았다. 기꺼이 응해야겠지. 


눈을 맞추고, 농담을 하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시간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새벽같이 일어나 눈꺼풀이 내려앉고 머릿속이 뿌연 체로 출근할지언정 내겐 만 5일이 긴 시간 동안 꿈꿔왔던 바다. 몸이 힘든데, 마음은 힘들지 않다. 고생하고 있는 중은 맞는데 즐거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내 몸 힘들지 않게 아이밥은 저녁에 준비해 뒀다가 아이 혼자 차려먹으라고 남편이 방법을 내어준다. 가까운 이웃이 얼굴이 말랐다 하길래 새벽에 아이밥을 짓는다고 하니 그녀만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며 편하게 지내라 한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아침에 일어나기 쉽지 않은 지금을 나는 심히 즐기고 있다. 그런 마음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기꺼이 새벽같이 일어나가 혼자 일어나는 아이에게 잘 잤냐고 하고 싶다. 일찌감치 잠자리로 들어가는 아이에게 잘 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학교에서 긴 시간을 지내고 돌아온 아이가 집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아이와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 기다리니라 느껴지는 배고픔이 좋다. 

가족들에게, 내겐 또 이런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들이 어김없이 우릴 찾아올 것이다. 다디단 오늘을 맛보기 위해 주어지는 시련을 반가움을 맞이할 수 있는 맷집이 내게 조금은 생긴 거 같아 기특하다. 오늘의 달콤함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기보단 글로 곱씹어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뿌듯하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비슬비슬 퇴근길에 웃고 또 우는 스스로가 사랑스럽다. 사는 맛은 이런 거로구나. 


별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시간을 담기란 쉽지 않다. 사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면 고통의 정도를 최대한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고 싶다. 내겐 글이 있다. 행운아임에 틀림이 없다. 시련은 또 찾아올 예정이고, 기록을 하고서는 버티기가 힘든 시간도 올 예정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 글감을 주기 위해서, 살아내라고 고통이 나를 찾아온다. 우리 모두가 이러할 진데, 이게 진짜 산다는 것일 텐데 SNS엔 아픔과 시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한 스토리보다 실패한 스토리가 더 값지다. 누군가 쓰러져있다면 내겐 도울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러니 내 자랑이 아니라 내 사연 토로를 통해서 누군가가 나를 도울 기회를 만드는 게 상대를 더 위하는 행위다. 운이 좋아 금수저이건, 긴 고생 끝에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건 그 어떤 경우라도 고통 없이 시련 없이 마치 그 자리에 존재하는 냥 생각 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건 가혹하다. 우린 서로를 좀 더 위로해줘야 한다. 녹녹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숨김없이 아낌없이 서로를 안아줘야 한다. SNS든 말이든 책이든 내 목소리를 들어줄 타인을 생각하며 살아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사진: Unsplashmicheile he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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