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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y 26. 2024

천 개의 파랑과 굿 나잇

 가족할인까지 받으니 단돈 2만 원이었다.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데 흥미가 없어 영어로 쓰인 책만 읽던 큰 아이에게 내밀었던 책이 천선란 작가의 책이었다. '랑과 나의 사막'은 하드커버의 두께가 얇은 책이어서 아이에게 권하기도 부담 없었다. 아이는 책을 끝냈고, '랑과 나의 사막'을 생활기록부 독서기록에 올릴 수 있었다. 단순히 거기에서 끝났다면 천선란 작가 작품의 뮤지컬까지 찾아서 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아이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왜 소프트웨어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하는지 꼭 집어서 대화하지 않아도, 그 책을 읽으면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실 어떻게든 아이를 방에서 이끌어내고 학교를 보내고 밥을 먹게 하는 기운을 차리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아이도 나도 치료를 받았던 강남역 대로변의 정신과 약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천선란 작가는 해낸 것이다. 나에게 천작가는 그런 의미였다. 성수에서 강남역까지 30분이 넘는 2호선 출퇴근길을 메운 것도 천작가의 책이였고, 혼자 먹는 점심 도시락의 낯설음도 함께 해준 것이 천작가의 책이였다. 양육 동지가 내겐 SF 소설이다. 

 은혜를 갚아야지. 받았으면 돌려줘야한다. 그게 언제든 어디서든 갚아야 하는거다. 내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 줄 알고 은혜 갚기를 미룬단 말인가?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 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는 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바로 검색을 했다. 공연도 딱 집에서 15분 거리의 예술의 전당이다. 귀신 같이 맞아떨어지는 이 모든 상황들은 한군데를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신 비스끄레므레 한 것은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우길, 그래서 내 평생 숙원인 엄마 노릇을 절대적으로 응원해주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중 제일 잘하는 것, 책을 읽고 책을 해석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꿀 용기를 내는 것이다. 

 

'천 개의 파랑'을 책으로 볼 땐 그렇게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뮤지컬은 천 개의 파랑을 모두 담아내었는데, 독서에 걸리는 시간 10시간 정도를 2시간짜리 극에 담아낸 PD는 천재가 아닌가 싶을 지경이였다. 천 개의 파랑이 담고 있는 주요 물줄기는, 천 개의 파랑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다. 또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이다. 아이를 소프트웨터 고등학교에 밀어넣으면서 SF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SF의 S, Science에서 거푸 철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과학이 문제가 아니야. 삶이 문제지.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소리를 듣는 듯 했다.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지만, 독서 토론이나 독후 활동은 함께 할 수록,함께 해야만 의미가 있다. 가족들과 천선란 작가 그리고 SF 소설들을 통해 들은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이 컸는데 방법이 막막했다. 거절 당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내게 제일 소중한 건 거절 당하면 용기가 크게 꺾일 것만 같아서였다. 

 가장 좌석 2만원 짜리도 4명이면 8만원이다. 식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두근거리며 공연 링크를 공유했다. 남편이 제일 먼저 답을 해준다.

 "갑시다."  

그가 든든하다. 그는 확실히 내 편, 아군이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꺼이꺼이 우는 나를 놀리지도 않는다. 옆에 앉았던 딸은 나오자 마자 도대체 엄마는 몇 번 우는 거냐며 놀려데는데, 남편은 그런 법이 없다. 


7시에 시작한 공연이 끝나니 9시 30분인데 하도 우니라 기운이 털렸다. 울음을 참기도 하고, 혼자 천선란 작가의 책을 읽던 작년 가을을 떠올리며 대놓고 눈물 흘리기를 2시간여를 하니 뮤지컬 관람 후 토론 따위를 할 힘은 1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우린 치킨집으로 향할 수 밖에. 

큰 아이가 좋아하는 순살 치킨 한 마리,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후라이드 한 마리씩을 싸들고 와서 맛있게 먹어도 천 개의 파랑, 뮤지컬, 생명 존중,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대화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린 잘 먹고, 깨끗히 치우고, 잘 잠이 들 뿐이다. 


내겐 다시 위기가 올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위기인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가 큰 아이의 사춘기가 끝나감을 느끼고 내 차례야 라며 자리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슬픔이 나를 동행한다고 해도, 사는게 뭐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냐며 소리지르고 싶은 순간이 지금일지라도 이젠 두려움이 덜하다. 책으로 길을 찾았고 셀프 위로 했으며, 잠깐씩 찾아오는 평정의 찰나에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해 볼 수 있었다. 

살아보니 살만 하다며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낸 자로써 미소지어줄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다운 삶이냐고 묻는 사람이 이 책만 봐도 세상엔 어마어마하게 존재하니, 살아볼 만 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게 또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젠장. 뭐가 이따위야! 사는게 뭔데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순간이 오면 난 또다시 도서관을 뒤질 것이다. 아이들에게 멀쩡한 답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책 안에서 가족들과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냥 맛있는 치킨 먹고 집중해서 관람한 날이다며 잘 예정이다. 천선란 작가님도, 콜리도, 투데이도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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