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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Sep 23. 2024

이기적이고 우아하게 살길 바랍니다.

 물놀이가 싫다. 근시가 심하고, 렌즈를 착용할 수 없는 눈을 가진 나에겐 안경은 말 그대로 눈이다. 안경은 눈만 못해서, 물놀이엔 쥐약이다. 아토피 때문에 바닷물은 따갑고, 수영장은 달라붙는 수영복과 안경 없어 무엇도 보이지 않는 뿌염 그 자체다. 물놀이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땐 안 가면 안 될 듯한 의무감에 패밀리 수영장을 갔다. 

 파도 풀장이었다. 큰 아이와 파도 풀장 가장자리에 서있다가 뒤로 큰 파도를 맞았다. 발을 더듬거려 보니 바닥이 닿지 않았고, 큰 아이를 붙들고 있던 손이 아이를 내 쪽으로 절로 끌어안게 되었다. 0.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을 텐데 천천히 지나갔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했다. 남들 다가는 캐리비안베이, 남들은 가서 하루종일도 도는 파도풀장, 남들뿐 아니라 남편과 작은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 곳에서 큰 아이와 나는 살겠다고 헐레벌떡 물밖으로 뛰쳐나왔다. 

 


 뭐든 바라보기 나름인 게다. 썰물처럼 일이 떠밀려온다 싶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을 쳐내면 사고가 날 것 같다. 마치 1년 전 입사하자마자 이제 막 인턴을 졸업한 경력 단절 아줌마처럼 말이다. 

 내가 바라는 나는 뭐든 빨리 멋들어지게 하고 싶었다. 몸 담고 있는 이곳은 내겐 걸맞지 않은 곳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은 옷을 걸친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 그럴듯한 직장으로 한시라도 옮기고 싶은 마음에, 여기서의 일은 손쉽고 가뿐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엇박이 생겨 실수를 벌이고 사고를 터뜨렸었다. 되돌이킬수록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시간들이었다. 먹은 나이만큼, 가정을 돌 본 시간만큼 지혜와 연륜을 갖춰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거듭 우겼다. 

1년 만에 오늘은 그런 마음이 파도처럼 돌아오는 오전이었나 보다. 남편은 연차 휴가까지 내고 분양 계약금을 처리했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되는 걸까? 이 중요한 일을 남편이 실수하면 어쩌나 싶어 자꾸 그가 어디쯤인지를 생각했다. 불안함은 오전 내내 무럭무럭 커졌다. 

 사수는 단축근무와 재택근무를 다음 주부터 시작하려고 업무인계를 시작했다. 오전 내내 분명 본 적은 있는데 능숙하진 않은 업무들이 쏟아졌다.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고, 실수 없으려면 찬찬히 해야 하는 성격의 일들이다. 실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크니 집중은 안되고 집중이 안되니 울고 싶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나를 감싼다. 


"아, 몰라. 뭐 잘리기야 하겠어." 

컴퓨터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는데 어지러웠다. 안 되겠다. 이대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잠시 라운지로 나왔다. 무거운 눈과 딱딱한 어깨가 느껴진다. 어쩌겠는가? 일보단 내 건강이 더 소중하고, 우아하기보단 지질하게 오래가길 선택해야 한다는 걸 내 몸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길 스스로에게 권해본다.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이가 타인도 아낄 수 있는 법이란 걸 알고도 남는다. 가정 안에서 나를 녹이다 녹이다 사라질 뻔했고, 착한 큰 딸, 멋진 장녀로 살아야 하기에 병이 났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내가 안 하면 누군가가 한다는 걸,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거라는 세상 지질한 명언을 PC에 붙이고 살아야겠다. 업을 길게 하려면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아, 몰라. 설마 이혼하겠어?"

만약 내 결혼을 이런 마음으로 바라봤었더라면 내 병은 조금 덜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번 명절 세 시누 중 누구도 오지 않은 해운대의 50평 아파트는 어머니 혼자 지키고 계셨다. 우리 가족이 가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혼자 전을 부치고 혼자 남편의 제사상을 차렸어야 했다. 호랑이처럼 눈을 흘기며 어디 한 번 잘하나 보자 했던 시누들 그 누구도 오지 않은 이 명절 덕분에 어머니의 눈빛도 한결 수그러들었다. 

어쩔? 어쩌겠는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가 한여름 날씨의 추석을 헤치고 어머니에게 도착한 사람인 걸! 

이기적으로 우아할 수 없다면, 이기적으로 지질하게라도 살겠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고 남 생각하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게 최악이다 싶다. 

일하기 딱 좋은 계절이 왔다. 가을이다. 드디어 젊은 나의 동료들이 에어컨 온도를 최저온도로 맞추지 않는 계절이 온 셈이다. 그러니 어쩌라고를 가슴에 새기고 이기적이고 지질하게 업무에 임하자. 오늘도, 내일도 말이다. 


 사진: Unsplash의Valeria Reve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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