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이 올라와도

오은의 '그'

by 나노

오은


그는 먹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화消化한다


고독은 씹는다

분노는 삼킨다

슬픔은 삭인다


기쁨은 마신다

희망은 들이마신다


사랑은 빨아들인다


뼈를 깎는 고통을

다시 뼈와 살로 만든다


살맛이 난다


먹으면서도 온통 먹을 생각뿐이다

감정의 소화 消火 때문에 늘 헛헛하다


달아도 써도 삼킨다

달콤하면서 쌉싸래해도

절대 뱉지는 않는다


그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출처: 『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사, 2023.



오은 시인은 저자특강에서 뵈었다. 수필집 『초록을 입고』 특강을 오셨는데, 그전에 이미 『없음의 대명사』를 좋아하고 있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한껏 자유로워 보이는 사고방식과 치열하게 국어사전을 탐색하는 열정에서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듬뿍 느껴졌다.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쓰는 분이 아니었다. 그 섬세하고 치밀한 에너지가 참 좋았다.


이 시 '그'.

그는 나일 수도 있고, 시인 자신일 수도, 혹은 우리 주변의 모두일 수도 있다. 온갖 희로애락을 집어삼키며 현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보여서 친숙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상식이지만, 결코 내뱉는 일이 없는, 묵묵한 우리내의 짠함과 위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그와 같다.


그는 감정을 '소화(消化)'하며 '소화( 消火)'한다.


消化 소화: 명사

1. 생명 섭취한 음식물을 분해하여 영양분을 흡수하기 쉬운 형태로 변화시키는 일. 또는 그런 작용. 음식물을 씹는 작용에 의한 기계적 소화와 소화 효소에 의한 화학적 소화가 있다.

消火 소화 : 명사

1. 불을 끔.


흔히 속에 천불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천불은 감정이 사그라들어야 꺼진다. 뱉으면 뱉을수록 더 화기가 차올라 불길만 거세진다. 그래서 정말 화가 나면 입을 닫고 밖으로 나간다. 누구라도 구워삶을 용가리 불꽃이 나갈 것을 알기에. 물론 되돌아왔을 때 재발화되는 것이 비일비재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내가, 세상과 사는 최선이다. 그러니 감정을 죄다 삼키는 그는 진정 어른이다. 다만 속이 멀쩡할까 염려스럽다.



시인이 알려주신

좋은 우리말 하나 선물: 발밤-발밤


발밤발밤

부사 :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


예) 공터에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해서 바람도 쐴 겸 발밤발밤 나가 보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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