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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자기 PR의 신인류, 그 혜안

by 나노 Feb 19. 2025

 정약용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기억은 독후발표대회의 ‘목민심서’였다. 뭐 백성을 위한 관리들의 필독서였다는 말을 듣고, 거침없이 도전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넘사벽이었다. 당시 교내외 독후 발표대회를 두루 다녔지만, 그렇게 난감한 책은 처음이었다. 일단 안 읽혔다. 그 말이 저 말 같고 이 말이 했던 말 같았다. 그래서 포기했던 책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고전도 읽을 수 있었는데, ‘목민심서’는 쥐약이었다. 뭐 중학생의 시선에서 너무 어려운 말 투성이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일단 너무 딱딱해서 글이 튕겼다. 마치 도덕책을 읽고 있는 느낌? 그래도 한 번씩 달콤한 일탈이라도 있어야지... 솔직히 지금도 완독은 하지 못했다.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절대 도전하고 싶지 않다!


그 뒤로 정약용을 만난 것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였다.  


드라마 ‘이산’ 속의 충신으로서 정약용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탐정으로서 셜록이 된 정약용

'성균관스캔들’ 속 스승으로서 정약용

영화 ‘자산어보’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


 

이 중 개인적으로 ‘성균관스캔들’ 속의 정의로운 스승 정약용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차갑고 엄격하지만 가슴만은 따수운. 아마도 내가 꿈꾸던 모습이라 더 매력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정약용을 정식으로 만난 것은 ‘자찬묘지명’을 통해서였다. 사실 뭐 깊게 연구하지는 못했다. 다만, 유명한 유학자가 자신의 생전에 묘지명을 쓴 것은 이례적이고 특이해서 주목한 정도였다. 고전은 참 재미있지만 한자를 번역하는 그 고통의 과정 때문에 양껏 공부하기가 참 어려웠다. 물론 나의 미천한 해석 능력이 원인이지만, 본업을 두고 하는 공부는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부족했다. 그래도 한참 공부할 때는 원문을 보고 찾아가며 읽을 수 있었는데, 이미 8년을 넘게 공부를 놓아버린 지금의 나는 문맹 수준이다. 그래서 번역본을 찾아 읽는다. 아주 아쉽지만... 번역은 반역이라, 직접 번역을 하며 읽어야 조금이라도 더 언어적 감각을 느끼는데, 남이 해준 번역은 반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반(半) 역이다. 하... 아쉽다.  



먼저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 대한 소개를 먼저 인용해 보면 이렇다.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순조 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서 정조 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 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출처: 헤드라인뉴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두 편이 보이는 특수성에 주목하면, 무덤에 함께 매장하기 위한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수록하기 위한 집중본(集中本), 도합 두 편의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집중본은 양적 방대함, 군왕인 정조와의 일화가 차지하는 비중, 정약용 자신의 저작을 정리한 부분의 비중, 천주교와의 관계에 대한 서술의 변화 면에서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중략) 즉,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의 방대한 서사와 요약적인 명(銘)을 통해, ‘성실한 유자(儒者), 군왕의 총신(寵臣), 정치적 모함의 피해자’라는 정체성 혹은 에토스(ethos)를 구성하려 한 것이다. (출처: 이주영,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한 문학치료적 고찰)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정약용이 왕이 세상을 뜨자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유배 중에도 여러 차례 태비와 자손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유배가 끝난 뒤에도 다시 관직에 등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서용보’가 번번이 저지하였다. 꼼꼼한 정약용은 그 과정을 간결하게 모두 ‘자찬묘지명’에 기술하여 ‘서용보’와의 악연을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파란 불꽃’처럼. 아주 섬광이 일어나는 기분이다. 시기별로 사건 사건마다 피의 데스 노트를 기록한 느낌! 그 시절 유명한 사람들은 다들 적수가 있었나 보다. 박지원은 말년에 유한준과 불구대천의 사이가 되었고, 정약용은 서용보와 그러했나 보다. 정약용이 본인의 성품을 기술한 내용들을 발췌해 보면,


"약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과감히 실천하고 행동했다.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요즘에도 본인 이름을 부르면서 화두를 시작하면 약간 자기애의 끝판왕처럼 보이는데.. 뭐 ‘자찬묘지명’이니 그 부분은 이해를 해야 한다.

영리하고 학문을 좋아한 정약용은 선행을 실천하고 고전을 사랑하며 신념을 과감하게 실천했다. ‘지행합일’이겠지? 아마 이것 때문에 화를 당했으니 운명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성품이나 행실 자체가 죄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시절의 운명. 그래도 그 뒤로 모두 본인의 죄라고 귀결시키기는 했다.

그런데 어디 그렇게 읽히는가? 점잖은 노신사의 겸손한 질책과 겸양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뿐인가? 회갑이 되어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이제는 자신의 억울했던 심사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마음속에 원망과 후회가 가득 쌓였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년,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말하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이런 미움과 화를 당한 이유가 담겨있다. 그것은 바로 ‘임금의 남다른 총애!’. 이해가 백 퍼센트 되는 대목이다.


"약용은 벼슬하기 전부터 임금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정종대왕께서 총애하고 예뻐하고 칭찬하신 것이 동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중략) 모두가 남다른 대우였다.”


 

다른 선물도, 책을 볼 수 있는 특권도, 유난했으니 그의 생이 ‘임금의 승하’ 뒤로 꼬이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러니 천성이 ‘영리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그 긴 긴 18년 세월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학문 연구였다. 그리고 이 ‘자찬묘지명’은 그 내역을 밝혀서 대대손손 남기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어찌 보면 그 저서를 세상에 남기는 것이, 환갑을 맞이한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현실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온 집안이 서교로 풍비박산 났고, 오랜 유배 생활을 한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 중간 내막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학문에 힘쓰기 좋아하던 천성 때문이며, 세월이 흘러 여러 차례 복권될 수 있었지만 ‘철천지 원수’ 때문에 막혔던 것이고. 그 덕에(?) 깊이 있는 저술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이것을 학문의 지표로 삼아 달라는 간곡한 청이 ‘자찬묘지명’의 의도는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약용은 유배돼 있던 18년 동안 경전 연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에 관한 저술이 모두 230권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우쳐 성인이 말씀하신 근본적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시문집으로 엮은 것이 모두 70권인데 조정에 있을 때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하는 일, 옥사를 다스리는 일,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 국토의 강역에 관한 일, 의약에 관한 사항, 문자의 분석 등에 관해 편찬한 것이 거의 200권이다. 모두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시의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더러 인용해서 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이 뒤로 묘지문의 요체인 ‘명’은 생각보다 소략하다. 본문을 장황하고 길게 기술한 것에 비하면 정말 상징적으로 정리하였다.  


 


"임금의 총애 한 몸에 안고

궁궐에 들어가 곁에서 모셨네

임금의 심복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하늘의 총애 한 몸에 받아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네

육경(六經)을 정밀하게 연구해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네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떨쳤지만

하늘이 너를 사랑해 쓰셨으니

잘 거두어 간직하면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

 <출전: 여유당전서 시문집 제16권>


 ‘잘 거두어 간직하면,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

정약용은 이미 후세 본인의 글과 위치가 달라질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이, 그의 저서가 아직까지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그의 후손인 ‘정해인’ 씨를 보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위대한 연구가 정약용은 여전히 살아 있다.

책으로 글로! 묘지명은 참 힘이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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