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는 게 아니야, 멋지게 추락하는 거지

<토이 스토리 (1995)>, 그리고 <나는 반딧불 (황가람)>

by 얕은생각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저는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되는 일은 없고,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날들이었죠.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제법 잘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럴까'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의욕도 사라졌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채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어릴 적 수십 번 넘게 돌려봤던 영화 <토이 스토리 (1995)>가 다시 보고 싶어 졌습니다.

unnamed.jp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단지 재미있는 무언가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그 영화가 보고 싶었고, 그래서 봤습니다.


다시 본 토이 스토리는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어색한 그래픽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했어요. 특히 제게 새롭게 다가온 캐릭터는 ‘버즈 라이트이어’였습니다.

GoUkJB2WIAAw1Wu.jp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버즈는 레이저, 접이식 날개, 다양한 버튼이 달린 우주비행사 장난감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모르죠. 자신은 우주의 수호자이고, 우주 평화를 위해 악당 저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너는 장난감에 불과해!"라는 우디의 질투 섞인 핀잔에도 말이죠.

GoUkRzCWIAA9P_E.pn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그러나 TV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은 가혹했습니다. 자신은 마트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이며, 잘해봤자 남들보다 조금 더 비싼 장난감 품목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절망감에 빠진 버즈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담아 날개를 펴고 창문 밖을 향해 뛰어오르는데요.


...그러나 역시, 그는 장난감에 불과했죠. 둔탁한 충돌음, 땅에 널브러져 빠져 버린 팔. 버즈는 체념한 듯 허공을 바라봅니다.

1237293ae81ebce0cb4510218a54148b.jp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그 모습이 꼭 저 자신 같았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이 답답한 학교만 벗어나면 내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리라, 오만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아니, 이미 예전에 깨달았지만, 학교라는 핑계를 대고 애써 외면해 왔을지도 모르죠. 저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못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이미 수십 번은 보고 또 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버즈가 과연 이 가혹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지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GoUk0ziW8AAH7mg.jp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2 (Toy Story 2, 1999)>

우여곡절 끝에, 버즈는 폭발형 로켓을 등에 단 채 우디와 함께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로켓을 떼어낸 뒤 하늘을 활강하죠. 우디는 신이 나서 외칩니다. "버즈! 너 지금 날고 있어!" 그 말에 버즈는 대답합니다.

이건 나는 게 아니야.
멋지게 추락하는 거지.
(This isn't flying.
This is falling with style.)
GoUlE64XQAI8j8G.pn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이 대사를 듣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깨달음을 얻어서 그날로부터 새사람이 되었다...라는 드라마틱 한 전개는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재미있는 영화에 인상 깊은 대사일 뿐이었죠. 그러나 이 대사는 제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되었고, 서서히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냈습니다. 그렇게 <토이 스토리>는 저에게 있어 단어 그대로 '인생 영화'가 되었습니다.

GoUlKbzWYAAVZ6r.jp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그 여름방학으로부터 다시 10년 넘는 세월이 흐른 2025년. 저는 좌절감과 자기혐오에 깊게 빠진 채 써브웨이 매장에서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장에서는 황가람 님의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죠.

GoUlPPeWUAAczpa.jpg 출처: 유튜브 채널 <놀면 뭐하니?>

'요즘 이곳저곳에서 자주 들리는 유행가' 정도라고 생각하며 그저 흘려듣고 있었는데요. 가사 하나가 문득 귀에 박혔습니다.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러고 뒤늦게 가사를 찾아보는데, 내용이 영락없이 토이 스토리 1편에서의 버즈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순간 가슴이 뛰더라고요.


당시의 저는 '지금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영상이냐'는 생각에 채널도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는데요. 이 이야기를 담은 영상만큼은 꼭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영상을 편집하면서 저는 또다시 버즈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10년 전, 그 여름날처럼요.

GoUljNJXkAA2KPt.png 출처: 영화 <토이 스토리 2 (Toy Story 2, 1999)>

우리는 모두 추락하는 중입니다.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정받던 일에서 실패할 수도 있어요. 결정적으로 우리는 늙어가고 있고, 죽음을 향해 점점 추락하고 있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추락하는 것뿐일 테고요.


그러나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다채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멋지게 활강하는 삶이요. 어차피 결국 마지막엔 추락할 것을 압니다. 내가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없는 평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멋지게 추락'하고 싶습니다.


마치 버즈 라이트이어가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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