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많은 학교를 옮겨다닌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결론적으로만 말하자면, 초등학교 네 군데, 중학교 두 군데 그리고 고등학교 두 군데를 다녔다. 물론 대학교는 한 군데이다. 보통은 이사를 가더라도 근처로 이사 가서 전학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 집안 사정은 달랐다.
서울에서 태어나 친가, 외가가 모두 있던 경기도 안산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은 우리 형제의 교육을 위해 학구열이 높은 분당으로 거취를 옮기셨다. 당시에 전학 간 첫날부터 24평 복도식의 좁은 집에 친구 3명 씩이나 데려와서 즐겁게 놀았고 어머니는 아직 이삿짐 정리가 완벽히 끝나 있지 않아 당황하셨겠지만 빠르게 적응하는 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는 1년이란 시간이 어쩜 이렇게 천천히 흘렀는지 참 좋은 기억이 많다. 수내동에 있는 중앙공원에서 친구들과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발야구를 즐기며 겨울에는 발에서 느껴지는 오드득 소리가 좋아 눈 덮인 아스팔트를 소복소복 걷곤 했다. 방과 후 수업시간 때 컴퓨터를 배우고 처음으로 납땜질이라는 것도 해보며 찰나지만 과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다. 특별히 공부는 하지 않았고 부모님 또한 기대가 크지 않으셨는지 학업에 대해서는 별말씀은 없으셨다.
4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편도 두 시간 출근길 압박으로 인해 충청남도 천안시로 이사 가게 된다. 그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는데 최근에 들어보니 천안에서 제일 학군이 좋은 불당동이었다. 이제 보니 부모님은 많은 이사를 다니더라도 우리 형제의 환경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셨던 게 아닌가 싶어 문득 감사하게 된다. 천안에서의 학교생활은 정말 행복 그 자체였다. 전학 갔던 초등학교는 우리 형이 졸업생 1기였을 만큼 새로 지어진 곳이었기에 다들 서로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딱히 전학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다들 빠른 시간 내에 친해졌고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라는 우리나라를 뒤휩쓴 블리자드의 희대의 역작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게임을 즐겼다. 그때는 조던링이라는 게임 속 아이템이 현실 세계의 금과 같은 화폐의 가치로 쓰였는데 모뎀이었나 ADSL이었나 어쨌든 열심히 인터넷 서핑을 하며 복제 버그를 알게 되었고, 컴퓨터 두대로 끊임없는 시도를 하여 우리 학교 전체에서 조던링이 제일 많은 인싸가 되어 있었다. 5학년 때는 그 코흘리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몇 개월 동안 사귀면서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손도 못 잡아본 첫 연애도 해보고 6학년 1학기까지 다닌 후 다시 분당으로 전학가게 된다. 전학 가던 첫날, 너무나 착했던 천안 친구들과는 달리 반 아이들의 거침없는 욕설이 난무하던 교실 분위기에 살짝 긴장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좋은 친구들을 만나 한 학기만 다닌 후 졸업식을 마쳤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정말 많이 사귀며 엄청난 개구쟁이의 역할을 다했다. 매시간마다 선생님들께 혼나는 일이 일상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게 행복했다. 중학교 2학년, 아버지가 주재원으로서 베트남으로 발령 나시며 1학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타지의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에서 국제학교라는 처음 보는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1년 정도는 고생했던 것 같다. 친구들을 만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영어 수업에 귀가 트이는 데까지 꽤나 힘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베트남에서의 생활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고등학생 2학년 2학기 때 다시 귀국하게 되며 새로운 환경에 맞닥들이곤 했다.
이렇게 수많은 이사와 전학을 다니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전학을 하나의 모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로운 여행이고 모험을 피할 수 없었기에 즐기자는 식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탑재했던 것이 뉴페이스들을 만나는 데에 대한 벽을 조금이나마 낮출 수있던 생존 본능이었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지역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나만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하며 넓은 인맥을 가지는 것에 대한 자부심까지 있었다. 전학 첫 날에 나는 첫 인상이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헛점을 잘 안보이려고 했다. 처음부터 무시당하기 시작하면 그대로 이미지가 굳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실수하지 않고 잘 스며들면서 어떤 부분에서 조금 부족하거나 힘겨워하는 애들을 챙기고 도와주며 호감을 얻곤 했다. 누가 알려줘서 한 건 아니지만 그저 본능과 경험을 통해 가능했다.
수차례의 이사와 전학은 나름 재밌는 여행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이사 갈 지역이나 집에 대해 부모님께 여쭤보기도 하고, 브로셔로 나와있는 그 집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구경하며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부유하지 않은 편이었기에, 그냥 낡고 좁은 집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인 경제적 한계와 우리 형제의 교육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맹모삼천지료를 손수 실천하신 우리 부모님의 헌신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동산이라는 것과도 거부감 없이 친해질 수 있었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을 겪으며 남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보다 더욱 깊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기질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모든 일에는 항상 장점과 단점이 있다.
이사를 여러차례 다니며 힘든 점도 많았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던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학창시절의 이 경험이 인생을 살아갈 때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나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 대해선 yes라고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