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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Apr 13. 2022

흑염소와 홈커밍

    “다음 수요일이야, 아침 여덟 시 십 분 전까지 와. 교대역에서 내려서 3호선으로 갈아탄 후 구파발이라고 씌어 있는 것 확인하고, 압구정동 앞쪽에서 내려서 현대백화점 쪽으로 올라오면 현대 주차장으로 나오게 돼. 거기에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 관광이라는 버스를 찾아. 우리 동기들이 그 버스를 타고 강원도 평창에 갈 거야…. 거기 평창 흑염소가 유명해. 꼭 나와. 그날 보자.”  


그리고 우물우물하다가 단호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냥 몸만 오면 돼.”  


그 뜻은 아마 딴 동기들은 다 회비를 내는 모양인데 나는 특별히 면제해 준다는 뜻인 것 같았다.  


“누구누구 오니?” 


멍청한 내 질문에, 


“다 우리 동기야. 다 아는 애들인데 뭘 그래? 오는 것으로 알겠어. 마침 꼭 참석하겠다던 동창 하나가 사정이 생겨서 못 간다고 하는 바람에 자리 하나가 생긴 거니까 그렇게 알고, 그날 보자.”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지난해 봄, 집안일로 2주간 한국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근 40년 가까운 세월, 한국 땅을 떠나 있다 보니 가깝던 친구도, 또 그냥 동기일 뿐인 친구도 만나볼 길이 없는 데다가 어디 시장에서라도 마주친들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처지라 서울 도착 후 도시에 떨어진 촌놈처럼 집안에 앉아 창밖만 내다보는 내가 한심해 보였나 보다. 집안 형님이 만나볼 친구가 그렇게 없느냐고 혀를 차더니 학교를 찾아 전화해서 물어보면 알만한 동창 한두 명은 그런대로 연락될 것이 아니겠느냐고 귀띔을 해주었다. 언젠가 우리 동기 중 가장 활동적이라는 친구의 이름이 생각났다. 용기를 내서(왜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좀 망설인 것은 사실이다.) 전화번호부를 찾아 수송동이 아닌 생소한 이름을 가진 동네로 옮겨간 여학교에 전화를 거니, 명랑한 목소리의 아가씨가 전화를 받는다. 어찌어찌 내 설명을 조금 듣더니 대뜸 '아, 그분은 현재 총동창회 회장님이십니다. 그리고 현 교장 선생님과도 동기이십니다' 한다. 


“우와….” 


너무 높은 분은 그만두고…. 우리 동기회장의 전화번호를 받아 걸었더니 마침 동창 모임이 곧 있으니 담당 동기의 번호를 주며 연락해보라고 해서 연락이 닿은 것이 평창의 흑염소 등산 일정이었다. 며칠을 갈까 말까 틈나는 대로 망설이다가 더 신나는 일정도 없고 집안 형님이 동창들의 등산 모임이니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고 부추기시는 터에 안 가겠다고 뻗칠 이유도 없어서 새벽에 집을 나섰다. 사실은 몹시 가고 싶기도 했다. 그 옛날 강원도에 갈 때는 한밤을 꼬박 기차에 시달려 갔었는데 버스 타고 휑하니 가서 산에 올라 흑염소로 점심을 먹고 또 그날로 돌아온다니…. 발전된 한국 실상의 한 면을 이렇게 보고 경험하여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집을 나서는 내게 형님이 넌지시 한 말씀하시기를 지하철 어쩌고저쩌고 하지 말고 그냥 문 앞에서 택시 타고 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어릿어릿하다가 딴 방향으로 가는 차라도 잘못 타면 강원도는커녕 경기도 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아프리카에 온 것도 아니고 내 나라, 내 언어, 내 문화가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데 그렇게 어릿어릿해 보인단 말인가…. 겉으로는 세심한 배려에 감사를 표하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나오고 보니 그래도 어른 말씀이 옳을 것이다. 서울의 지하철이 오죽 번잡한가…. 슬그머니 걱정이 생기는데 마침 빈 택시 하나가 내 앞에 와서 선다. 망설일 일이 아니다. 저만치서 내 앞에 선 택시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아저씨를 발견하고 날렵하게 택시에 올라타 압구정동 현대 주차장으로 가자고 기세 좋게 방향을 말했다. 그런데 서울의 택시기사는 역시 촌놈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있었다. 아니면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신고를 할 요량으로 관찰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쯤 가더니 룸미러를 들여다보며 말을 건다.  


“여기 새로 이사 왔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아니요, 그런데 왜요?”  

“아니, 차에 탈 때부터 창밖을 계속 두리번거리고 높은 건물은 올려다보고 난리잖아요?”  


넌 오브 유어 비즈니스(none of your business: 뭔 상관이람), 물론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푼수 없게 보이지 않으려고 점잖게 앞만 바라보다 미터기를 보니 대략 6천 원 나온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쯤 왔는지도 모르는 터에 8천 원이 넘어가고 있었다. 차는 막혀서 움직이지 않고 운전사의 뒤통수가 어쩐지 정직해 보이지도 않아 나는 아차, 하면 내릴 요량으로 방향 감각이라도 잡아보려고 또다시 창밖을 두리번거리고 높은 건물은 올려다보며 좀살맞게 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멍청해 보이면 택시 운전사가 납치해 가서 팔아버리는 수도 있다고 놀리며 겁주던 형님 얼굴도 떠오르고…. 나같이 늙은 여자를 어디에 쓰려고 납치해서 파느냐니까 주로 마늘 까는 일에 요긴하게 써먹는다는 이야기 하며…. 차분하게 설명받은 대로 지하철을 안 탔던 것이 후회막급으로 나를 긴장시키는데….  


“여기에요.” 


역시 룸미러를 들여다보며 운전기사가 차를 세운다. 학교 운동장처럼 드넓은 주차장 뒤로 높이 보이는 건물에 현대백화점이라는 사인을 확인하고 보니 운전기사의 얼굴이 갑자기 옆집 아저씨같이 정답게 느껴진다. 

‘마늘 까기는 면했구나.’ 


서너 대 늘어서 있는 관광버스 중 '하나 관광'이라고 씌어있는 버스로 달려가 올라타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웬 아주머니들…? 처음 보는 아줌마들이 이미 버스를 꽉 채우고 와글와글, 와글거리고 있었다. 빛나는 미래를 가슴에 품고 잘생긴 남학생을 흘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발개지던 그 소녀들…. 그 소녀들이 아줌마가 되어 지나간 세월을 업고 와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 낯선 아줌마는 누구일까...? 내가 그들 중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그들 중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앞문으로 올라타서 두리번두리번 비어있는 뒷자리를 하나 찾아 앉을 때까지 나는 소외되었고 타인이었고 이방인이었다. 아줌마들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해왔다.   


“혜영이가 온다더니, 잘 왔구나….”  


누구더라…. 그래, 모범생이던 풍자. 그 옛날 모범생과는 될수록 멀리 지냈던들 무슨 상관이랴. 아마 동기들의 친교 부장직이라도 맡은 듯 싹싹하고 상냥하여 처음으로 아는 얼굴 대하니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마음을 써준 친교 부장 덕인지 황공하게 앞 좌석 가까운 창가에 다시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펴보니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는 얼굴들…. 아, 또 아는 얼굴 정수자. 고1 때던가. 이 모범생과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짝이 되어 그 애 집에 놀러 갔는데 장녀의 친구가 왔다고 그득히 차려 내온 저녁상을 받아 잘 먹은 후 아랫목에 발 뻗고 수다 좀 떨까 하는데 수학 담당 가정교사가 들이닥쳐 먹은 것 소화도 못 시키고 쫓겨난 적이 있었는데…. 나를 못 알아보고 말가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옥환이. 이 애는(애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나와 잠깐 짝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착했는지 공부 시간에 취미로 하는 내 거짓말을 지치지도 않고 들어주다가 선생님께 합동으로 야단맞는 일에 단골일 뿐만 아니라 가상으로 만들어놓은 내 남자 친구 이야기 듣는 것이 거의 낙이었다. 이 착한 옥환이에게 나는 얼마나 많은 소설을 써댔던 것일까…. 매일매일 연재소설을 써대면서 수많은 빵집에서 먹은 곰보빵, 빠다빵 메뉴까지 작성해야 했던 나는 그때 등장시켰던 잘생긴 남학생이 정말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는데…. 그 애도, 나도 처음에는 서로 못 알아보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는 유리창에 떠오르는 중늙은이들의 얼굴…. 40년이 훑어간 얼굴들. 반가움도 놀라움도 순간순간 지나가고 친구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는 세월의 흔적을 상념 속에 묻으며 계속 제공되는 먹거리에 눈을 돌리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살아온 내 생활이 낯설기조차 한데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평창에 도착하여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그곳의 명물인 방목 해 키운 흑염소를 잡아서 점심으로 먹고 자연을 만끽한 후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식당은 산 위에 있어 우리는 우선 산을 올라가야 했다. 뙤약볕 아래, 산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민둥하고 들판이라고 하기에는 그런대로 경사져 보이는 언덕배기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흑염소는커녕 토끼 한 마리, 닭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등산 부장이 앞으로 썩, 나서더니 안내 말씀드린다고 목청을 돋운다.  


“여기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올라가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있고 영양 높은 흑염소 고기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등산이 힘든 분들을 위해서는 교통편이 제공됩니다. 곧 여러분을 태우고 올라갈 트럭이 도착할 테니 잠시 기다리셔서 타고 올라가시고 걸어 올라가는 것에 자신 있으신 분들은 저를 따르십시오.” 


한 시간 정도라면 걸어 올라가도 되겠다 싶어서 나는 벌써 비호처럼 앞서가는 등산 부장 ‘구자’의 뒤를 따르는 아줌마 몇 명과 함께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등산을 자주 가는 편이고 산 오르는 데 별 어려움을 모르던 터라 쉽게 생각했던 것은 한국의 나지막해 보이는 산들의 특성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내린 판단이었다. 조그만 승용차 하나 지나가기 힘든 좁은 돌밭 길에 사정없이 내리쪼이는 뜨거운 햇볕 아래는 잠깐 쉬어가거나 그늘을 만들어 줄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이따금 서 있는 나무라는 것도 그 크기가 내 허리 이상 되는 것은 없고 높고 깊은 산자락이 있어 그늘을 드리워주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쨍쨍한 햇볕 아래 거친 돌들이 구르는 먼지 길을 걸어 오르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특공대가 받는 특수 훈련에 가깝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냥 헐떡거리며 힘들게 오르다 보니 구자는 역시 등산 부장답게 새까만 점이 되어 저 앞 능선을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에게서 얻은 양산 하나로 얼굴을 가리고 나는 위안이라도 받을까 싶어 오늘의 양식이 되어줄 흑염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저 밑에서부터 트럭이라기보다 미니 픽업트럭 같이 생긴 차 한 대가 뒤에 아줌마들을 그득 태우고 올라와 빨갛게 익어서 헐떡거리는 우리 일행을 보고 멈추더니 타라고 한다. 짐 실어 나르는 그 뒤 칸은 도저히 우리가 탈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 운전사는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타라고 성화다. 우리는 마지막 떠나는 피난 열차에 목숨이라도 걸듯 올라타 끼어들어 주저앉았다. 아, 콩나물시루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겠구나, 하는 순간 운전사는 짐칸에 실려있는 것은 단지 짐일 뿐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는 듯 그 엄청난 비탈길을 맹렬한 속도로 운전해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옛날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났다. 버스를 타면 있는 대로 승객들을 쑤셔 넣고 그 연약한 소녀 차장이 문밖에 대롱대롱 매달려 오라잇, 하고 두드리면 운전사는 버스를 출발시키는 순간 슬쩍 운전대를 문 반대쪽인 왼쪽으로 틀었다가 즉시 오른쪽으로 요동치듯 튼다. 그러면 문밖에 매달려있던 여차장은 어느 틈에 문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아걸게 된다. 그리고 그 안의 승객들은 그런대로 정돈이 되어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이치가 우리 짐칸에서도 적용이 되었는데 다른 점은 구태여 핸들을 돌리지 않아도 구불구불한 길 자체가 쉴 새 없이 우리들의 엉덩이들을 오른쪽, 왼쪽으로 옮겨가며 정돈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무서웠다. 때로는 오른쪽으로 쏠리는 순간 까마득한 비탈 아래가 눈앞에 화악, 닥치기도 하고 우리가 탄 짐차의 바퀴에서 튀어 나간 돌무더기들이 저 밑으로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우리는 계속 비명을 질러대며 피난 열차 이야기로 떠들어댔는데 나는 일간 신문 3면에 '환갑 넘은 여고 동창생들 흑염소 먹으러 가다가 참사'하는 머리기사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설마 내가 거기에 끼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뉴저지의 우리 가족들, 아무리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어찌 산꼭대기까지 흑염소를 먹겠다고 가다가 그 꼴을 당하는고, 하고 신문을 읽으며 혀를 차는 사람들…. 나는 든든한 사고 생명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음을 잠깐 후회했는데…, 미니 픽업트럭은 끄떡없이 산꼭대기 조그만 민가같이 보이는 식당에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오금이 펴지지 않아 너나 할 것 없이 합창이라도 하듯 아이구구, 소리가 주책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환갑 노인의 티를 숨길 수가 없다. 뿌드득거리는 관절들을 두드리며 넓지 않은 마루방에 들어서니 정면의 넓게 트인 창문 밖으로 산 아래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그곳이 강원도 평창, 겨울 올림픽으로 한동안 신문에 시끄럽던 친밀한 명칭의 도시이다. 흰 깃털 같은 구름 몇 조각이 저 멀리 떠 있는 평화로운 여름 풍경은 그냥 그대로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여서 올라올 때의 숨 막히는 스릴이나 흑염소를 먹는 따위의 저속한(?) 생각은 부끄러운 듯 사라지고 낭만적인 생각에 순식간에 젖어든다. 

그 아래 비탈에는 닭 몇 마리가 우물가에 끈에 꿰어 묶여있는 것이 보였는데 등산 부장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흑염소는 이미 솥 안에서 끓고 있고 흑염소를 못 먹는 친구들을 위해서는 토종닭이 준비되고 있다고 했다.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고 땀을 닦으며 오가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 아줌마들의 대화의 주인공들이 손주들인 것을 알았다. 나의 '아줌마들'이란 호칭은 할머니로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내 정신 상태가 아직 그것을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은 그 할머니들이 내 동기이기 때문이고 나는 아직 할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근조근 친한 사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들을 들어보니 유치원생, 초등학생, 다양한 손주들에 대한 자랑이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그 대화의 광장에 끼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목숨을 잃은 닭들이 털을 뽑히고 커다란 솥 안, 끓는 물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먹히기 위하여 태어난 그들, 그래서 살을 찌워야 했던 그들을 먹어주는 것이 오늘의 스케줄인 고로, 잠시 후 우리들은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준비된 식당의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순식간에 잘게 찢겨 우리들 상에 오른 그 살들을 이름 모를 야채들과 산나물을 섞어 쌈을 만들어 먹으니 잠시 전까지 생명 보험을 생각하던 내 이성이나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던 문화적인 감성은 먹는 본능의 즐거움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리고 “아! 행복하다.” 


트럭에서 받은 고문과 같은 하산길로 집에 돌아가는 내 두 다리가 자꾸만 저려와 헛발을 내디뎠지만 무사히 돌아온 안도감과 나의 추억의 장에 확실하게 저장된 순간순간의 추억들이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하리라는 확신이, 내가 먹은 쫄깃쫄깃한 흑염소 고기 맛과 같이 신선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 


단발머리들을 마주하고 한 운동장을 함께 내달리던 친구들과의 그 옛날이 갑자기 그리워지는 날, 나는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이 흑염소를 먹으러 등산을 하러 갔던 외롭고 뜨거웠던 이 날을 그리워할 것이다. 빈틈없이 일행들을 보살피던 친구들에게 변변히 인사도 못 한 채 유성처럼 홀연히 떨어져 하루를 함께한 채 돌아와 벌써부터 그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꼭 흑염소의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 분명한 것이다.    


-여고 동창들과 졸업 40주년 홈커밍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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