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읽은 글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서당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어린이들을 앞에 놓고 물었습니다.
“너는 장래 무엇이 되려고 하느냐?”
첫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임금 아래 제일가는 정승이 되려고 합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해했습니다.
“저는 장군이 되렵니다.”
둘째 아이가 대답하자 스승은 피안 대소하며 기뻐했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셋째 아이에게 스승은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려느냐?”
“개똥 세 개를 준비해야겠습니다.”
“무엇이야?”
스승이 눈을 부릅떴습니다.
“네 이놈, 스승을 놀리는 것이냐? 우선 그 개똥을 무엇에 쓰려는지 사연이나 들어보자.”
셋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한 개는 게으르고 아둔하여 제 이름자도 제대로 못쓰며 놀기만 좋아하는 주제에 정승이 되겠다는 첫째에게 먹이겠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아이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개는 동네 아이들과 편 싸움하며 놀 때 제일 먼저 도망가서 숨는 주제에 장군이 되겠다는 둘째에게 먹이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한 개는?”
스승이 호령하며 아이를 노려보았습니다. 아이가 스승에게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의 자질을 파악도 못하고 그런 헛된 소리를 기뻐하는 어리석은 스승님께 나머지 한 개를 드리겠습니다.”
낡은 노트 속에서 오래전, 아마 10년 전쯤에 써놓은 글을 찾아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이 “10년 후” 였습니다. 그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 10년 후에 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지나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을 생각해 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냥 바쁘게 살아온 이외에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 10년 전에는 지금은 내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었음을 알았고 그때 '10년 후에 되고 싶었던 나'는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온 집안 가득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들어대는 소리는 제 갈 길을 찾아서 떠나버려 적막만이 남았고 뒷마당의 미끄럼틀은 녹슬고 삭아서 찌그러진 흉한 몰골이 된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10년 전의 영혼과 육체 속에는 놀랍게도 그득한 꿈과 용기가 있었음을 압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10년 전, 내가 꿈꾸었던 10년 후의 내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주름살과 함께 늙음은 저 앞에 앞서가고 있고 타오르던 꿈은 퇴색해버려 모습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미련함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지난 세월이 내게서 앗아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보다도 더 소중한 연륜이 주는 성숙함과 관대함입니다.
나는 머물러있는 사람일 뿐이었지만 그것도 몹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산골짝을 흐르는 시냇물의 작은 조약돌이 그냥 머물러 있고자 해도 흐르는 줄기에 쓸려 어느 때인가 커다란 강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또다시 “10년 후”를 쓸 것입니다. 이제 헛꿈을 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 지구상 어디에선가 숨 쉬고 있다면…, 그냥 곱게 늙고 싶습니다. 그 옛날 그 스승이 학생들에게 물었던 것처럼 우리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 장래 희망을 쓰라는 난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장래 희망이 곱게 늙는 일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곱게 늙는다는 것이 외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노화 방지, 주름살 제거, 명약을 퍼붓고 수술로 짜깁기를 해도, 슬며시 스며들고, 지름길로 찾아드는 노화의 흐름은 선명합니다.
욕심도, 질투도, 거짓도 다 제거되고 헛됨에 눈이 멀지 않은 현명한 노인네가 되어 개똥을 먹는 주책 없는 노인네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항상 내가 필요한 사람을 향하여 눈길을 주고 마음을 주고 발걸음을 옮기며 사는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생활 속의 어려움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정다운 노인네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0년 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늙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