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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Apr 25. 2022

결혼기념일

    아주 오래전, 가슴 두근거리면서 맞이한 결혼 1년 되던 날, 나는 맨해튼 록펠러 센터의 60 몇 층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초대되었다. '초대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결혼기념일에는 와인잔을 홀짝거리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며, 그러기에는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조언을 명심해서 들었던 남편이 용감하게 예약했다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비싼 느낌이 드는 그런 장소에 마음 놓고 드나들 수도 없었을 그때 형편이지만 어쨌든 남 다하는 일 나도 한번 못해볼쏘냐 큰맘 먹고 거금을 투자하여 내게 그런 곳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었던 듯하다. 결혼기념일에는 당연히 가는 곳. 그런 은은하고 분위기 나는 곳에서 로맨틱하게 둥근 탁자에 촛불 하나 켜놓고 벽 전체가 두꺼운 유리로 된 저 밑 아래로 흐르는 차들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입술 끝에 와인 맛을 음미하는 시간. 그날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깝다던 지하철역을 잘못 내려 둘째 발가락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쳐대는데 대책 없이 찔뚝거리면서 오랜만에 꺼내 신은 하이힐을 벗어들지도 못하고 출입구를 찾아 헤매던 일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레인보우 룸이라고 했던가, 허덕허덕 그곳에 찾아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는 그 분위기에 맞추려고 후까시를 잔뜩 넣어 빗어 올린 머리가 땀에 젖어 떡같이 서로 들러붙어 하나같이 키 크고 멋진 미국 사람들 틈 속에서 주눅 들어 황망했던 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 기억도, 포크와 나이프를 휘둘렀던 기억도, 입술 끝에 와인 맛을 음미했던 기억도 없다... 갈팡질팡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헤매던 아팠던 발가락의 기억만 남았던 그날 이후 해마다 찾아오는 결혼기념일. 고백하건대 잊어버리고 지나간 때도 있었고, 문득 생각해보니 된장찌개와 찬밥으로 적당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TV 앞에서 한참 졸다가 생각났을 때도 있고, 다음 날 일일 때도 있었고, 잔뜩 별렀지만, 당일에는 생각도 못 했다가 며칠 지나서야 혹시 잊지는 않았는가 점검해보고 한탄해버린 적도 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특히 태양이 나를 향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온종일 두 손 놓고 앉아 여왕님같이 시중받을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눈 뜨고 일어나 매일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끝장에는 헛물을 켜는 것으로 끝나지만 은근히 보골보골 어떤 물질적인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는 평소와는 어쩐지 다른 기분의 하루를 살지 않았던가….



얼마 전,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남편이 그래도 잊지 않았다고 생색을 낸다.


그때 그 장소, 레인보우라는 곳은 아직도 영업하는지 그 이후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 알 길이 없지만, 발가락에 문제가 없더라도 또 그런 곳에 가서 분위기 어쩌고 하며 저녁을 먹을 마음도 없다. 게다가 로맨틱한 분위기는커녕 하늘의 별들도 뒷마당에 앉아 바라보다 목 디스크 생길까 겁나는 지금 다행히 잊지 않고 생각이 났으니 어쩐지 집에서 노상 먹는 된장찌개보다는 굳이 따지자면 외식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네.”

“정말 그렇군, 40년인가 39년인가.”


손가락을 동원해서 계산해보아도 잘 모르겠다. 딴 사람들 세월 40년 하면 긴 세월일 것 같은데 나의 지나간 40년은 어찌 이렇게 잠깐인 것 같을까. 해물 순두부를 먹고 싶은데 그래도 좀 나은 메뉴를 쥐어짜려니 머리가 아프다.


“샤부샤부나 먹으러 갑시다.”


구태여 와인잔을 들고 신통치 않은 이로 스테이크를 씹어야만 기념되는 날은 아니지 않은가…. 이따금 월남 국수나 샤부샤부로 한 끼를 때우는 집 근처 '포오식당'을 향해 가볍게 집을 나선다. 분위기에 맞는 헤어 스타일도 없고 하이힐 대신 운동화에 편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찾아 들어간 식당에서는 후루룩후루룩 하얀 티스푼으로 국물을 떠 마시며 대화를 나누려 해도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앞쪽 맞은편에 40 초반의 아는 부부가 앉아서 식사하는데 그쪽도 서로 말없이 후루룩후루룩 국수만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을 보니 꼭 우리가 늙고 문제가 있어서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절벽 앞에 선 듯한 절박함도 있었고 산더미같이 덮칠듯한 파도가 닥치는 위기도 있었을 것이다. 다 잘 넘기고 온 세월들…. 그 세월들이 후까시가 사라진 납작한 뒤통수에도 아랑곳없이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며 할 말을 찾아보려 애쓰는 오늘을 빛내주는 것이 아닌지……. 입술 끝에 와인 대신 입천장을 데는 뜨거운 국물에 후후거리며 새삼 함께 살아온 날들이 소중하게 가슴을 적신다. 그래도 오래전에는 결혼기념일이라고 록펠러 센터 맨 위층에 자리 잡은 레인보우 룸을 찾던 멋진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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