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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Apr 27. 2022

패스캑 벨리호의 침몰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소문이 자꾸만 떠돈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한두 해 전부터 건강 보험의 실책으로 많은 병원이 재정위기에 처하게 됐고, 이로 인해 문을 닫는 병원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실리기는 했다. 그리고 나열된 병원 리스트에 내가 근무하는 ‘패스캑 벨리Pascack  Valley’ 병원 이름이 끼어있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하기도 했었다. 

 패스켁 벨리 병원은 뉴저지주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자 뉴욕 맨해튼이 바라보이는 요지이며 교통 좋고 학군이 좋아 이민 온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버겐 카운티의 중부 쪽에 자리 잡은, 50년 역사를 가진 종합병원이다. 1959년 6월 1일, 86개의 베드를 갖춘 종합 병원으로 설립되었고 이후 계속 확장하여 291개의 입원 베드 수를 가진 커뮤니티 병원으로 성장해, 버겐 카운티의 4대 종합 병원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2005년에는 마치 일급 호텔 같은 산과 병동을 새로 지어 그랜드 오픈을 한 후 적극적인 홍보로 산모를 유치하고 있는, 경제 위기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위용을 가진 병원이다. 

 이 지역은 중산층들이 사는 지역으로서 같은 집에서 할머니 대(代)부터 살았다는 토박이들이 비슷비슷한 생활환경에서 사는 곳이다. 커뮤니티 병원답게 입원실은 물론 어느 부서나 변함 없이 환자로 가득 차 있고 주차 장소가 모자랄 정도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병원이다. 병원 복도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 직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어 경제적인 위기라는 것은 어림도 없어 보인다. 지난 연말에는 호텔 볼룸에서 내가 가보았던 연말 파티 중 가장 멋지고 품위 있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던 터라 재정위기라는 말은 실없는 소리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적극적인 리더십을 가진 병원장 이커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사회 멤버로 추천된 월스트리트 은행가 출신인 최경희 씨에 의해 미국 종합병원에서는 처음으로 2003년 한국부가 신설되었다.  

 최경희 씨는 적극적인 사고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은행가 출신으로 9.11 사태를 눈앞에서 목격한 후 월스트리트를 떠나 커뮤니티 봉사활동에 뛰어든 사람이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많은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통하여 지역 사회 한인들의 건강을 위하여 사실상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와 병원 한국부 디렉터인 최경희 씨와의 만남은 특별하다. 나는 2000년부터 이 패스켁 벨리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살면서 밥만 축내는 사람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어디에서든지 남을 돕는 일에 내 시간을 내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2002년 봄, 역시 자원봉사자 이사회 멤버였던 최경희 씨가 내게 전화를 해왔다. 병원에서 나를 소개받았다며 한국부 만드는 계획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망설이는 나에게 용기를 주면서 같이 일해 보자고 설득했다. 나는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미국인 사회 속에서 일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내가 병원이라는 사회 속에서 감당할 모든 일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겁내고 주저앉아버리는 타입이 아니다. 오케이, 해보자. 그게 내 방식인 것이다. 2년 정도만 하고 은퇴해서 따뜻한 플로리다에 가서 노년을 잘 지내자. 그것이 2002년도의 내 계획이었다. 이 만남은 나이 50 중반을 넘어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는 시기에 내 노년의 세월을 값지고 귀중하게 살 수 있게 된 특별한 만남이라는 점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병원에 가면 우선 긴장되고 불안하다. 특히 미국에서는 언어 소통에도 자신이 없어 불편하고 어리둥절한 한인 환자들을 위하여 통역과 안내를 도와주고 문제가 있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이중언어 구사가 가능한 직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만큼 한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나의 영어가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도 역시 많아 나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병원 직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돌팔이 의사까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부가 이제 제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뒤에서 수군대는 듯 들리더니 2007년 봄에는 이 병원이 헤캔색 병원에 넘어가게 될 것이란 소문이 구체적인 조건과 함께 병원 안에서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구체적인 소문이라고 해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설마, 이렇게 큰 병원이 쉽게 문을 닫을 수가 있을까….” 


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을 수는 없어도 다른 큰 병원으로 흡수되는 일은 가정할 수 있었다. 경영진이 바뀐다 해도 우리처럼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냥 일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여름을 지나면서 기정사실로 되는 듯했다. 그동안 비용 절감을 위하여 병원 측에서 많은 직원 수를 서서히 감축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재빨리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난감한 사람들은 30년 이상을 이 병원에서 근무하고 은퇴를 앞둔 의료 직원들이었다. 은퇴를 앞둔 나이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 알맞은 자리를 보장받기는 힘들고 느닷없이 딸 같은 상사 밑에 들어가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개인 사정은 각자의 몫이다. 


멀리서 수군거리던 소문은 조금씩 가깝게 다가오더니 2007년 한여름, 헤켄섹 대학병원에서 이 병원을 사기로 했다는 기사가 새로 개축한 현대식 건물 사진과 함께 뉴저지 신문 1면을 장식하였다. 그렇게 됐구나…, 별로 나쁠 것은 없었다. 우리들이야 그냥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8월 말, 신문에는 패스켁 벨리 병원과 헤켄색 대학병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정을 보지 못했다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법원에서 패스캑 벨리 병원을 공개적으로 경매한다는 기사도 실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막강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높은 가격으로 낙찰받아 넓은 대지와 손색없는 현대식 건물을 지닌 종합병원의 오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커뮤니티 병원은 재력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수도 없는 공청회를 열어야 하고 주민들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거기다가 정치적인 영향력이 막강한 후원자의 절대적이고 꾸준한 지원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표현으로 대서양을 메우겠다고 자갈돌 몇 트럭씩을 갖다 부어도 꿈쩍도 안 할 것이란 이야기다. 실제로 어느 재력 있는 한국교포가 검토해보다가 물러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동안 의료 개혁의 실패로 뉴저지주의 40여 개 종합병원 가운데 열여덟 개의 병원이 파산 신청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남 일처럼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꼭 남의 일만은 아니로구나, 하는 실감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병원이라는 곳이 어떻게 운영되어가는 것인지 나도 궁금했다. 미국 법에는 누구든 병원 응급실에 들어오면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 이 법은 절대로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의사도 치료를 거부할 수 없다. 건강 보험이 없는 환자가 배가 몹시 아파 응급실에 들어온다고 하면,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심장 검진을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그리고 응급실 담당 의사가 와서 진찰하고 피검사를 하고 소변 검사까지 하게 된다. 여기까지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왜 배가 아픈가 캣스캔(CAT  SCAN)을 찍게 된다. 캣스캔을 찍어도 아무 이상이 없고 혈액 검사에도 별 이상이 없을 때는 처방을 받고 퇴원하게 된다. 거기까지의 경비가 대략 5천 달러 정도 된다. 즉, 보험이 없는 일반인이 응급실에서 그 정도의 검사를 하고 퇴원할 경우 병원에서 받게 되는 청구서가 대강 그 정도인 것이다. 그 정도의 청구서를 받고 처억,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쉽게 낼 수 있다면 벌써 보험을 들고 있을 터이다. 

어쨌든 검사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무언가 좀 더 석연치 않다는 판단이 될 때는 위내시경과 장내시경을 해야 하고, 수술하게 되든지 항생제를 며칠간 투여받게 되든지 하면서 위장 전문의 또는 신장 전문의, 심장 전문의들이 두루두루 불려 와 진찰을 한다. 열이 있으면 염증 전문의가 와야 하고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면 정신과 전문의가 호출을 받는다. 이따금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면 심장 전문의가 와야 하고 스트레스 테스트와 방사선 검사도 받는다. 병원 입장에서는 환자를 그냥 붙잡고 있다가 나중에 고소라도 당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래서 각 전문의는 이 검사, 저 검사, 지시를 내린다. 이 모든 검사가 청구서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검사를 굶어가면서 닷새쯤 걸려 끝내고 나면 ‘운 좋게도 건강상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하는 진단을 받고 ‘일주일 후에 담당 의사의 오피스에 전화하여 예약을 잡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는 퇴원 동의서에 서명한 다음 병원 문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 아무 병도 없는데 병원에 붙잡아 놓고 고생만 시켰다고 원망한다. 이 환자가 병원에 들어올 때 정확한 주소를 기입했으면 그 주소로 2주 안에 보통 2~3만 달러의 청구서가 간다. 이 병원비 외에 적어도 대여섯 군데 의사 사무실에서 제각각 청구서가 날아온다. 환자는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말이 통하는 한국부에 전화를 한다. 그리고 자신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주고 저소득층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체리티 케어(charity care)나 패밀리케어(family care)등의 길을 찾아달라고 하기보다는 일단 화를 내고 한탄을 하고 ‘나는 그 돈 없소’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미국에 사는 한, 병원 청구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을 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이가 들어 정말 아무 데도 비빌 곳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후에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집을 사거나 심지어 차를 사게 될 때 이 해결되지 않은 병원 청구서로 인해 거절을 당하고 문제가 생기는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홈리스(노숙인)가 된 환자가 들어온다. 돈 안 가지고 오면 입원할 수 없어요, 했다가는 병원이 큰 곤욕을 치른다. 물론 그렇게 하는 병원도 없지만 말이다. 홈리스든 아니든, 똑같이 모든 검사를 마치고 완쾌하여 병원을 걸어 나가면 끝이다. 남미에서 온 어느 환자는 퇴원 후 가족이나 보호자의 간호가 절대 필요한 상태인데 아무 연고자가 없어 1년 이상을 병원에 머물다가 간신히 남미 고향의 가족과 연락이 되어 떠나갔는데 이때 병원이 비행깃값까지 제공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이따금 병원은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내 두뇌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쉽게 생각하면 공짜 밥을 먹고 도망가는 손님으로 가득한 식당이 어떻게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는지 내가 어찌 알 것인가…. 병원 직원들이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한 9월 초, 패스켁 벨리 병원과 헤켄색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신문 기사가 실렸다. 곧이어서 병원 측이 파산 신청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설마, 하던 일이 사실로 표면화된 것이다. 병원도 병원이지만 우리 한국부는 어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우리 한국부는 카운티에 사는 한국인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함께 옮겨가는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한국부 디렉터인 최경희 씨가 비장하게 선언했다.  


  “버겐 카운티의 남은 세 병원 중 한 곳으로 정해서 그 병원에 한국부를 신설하려고 합니다.” 


최 디렉터는 그 경력과 일의 열정에 대한 높은 평가로 여러 탄탄한 곳에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그는 혼자 살 길을 찾아가지 않고 한국부 직원 전체와 함께 움직일 곳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그의 꿈과 그 창대한 계획은 내가 가늠할 길이 없다. 


드디어 9월 초, 전 직원에게 병원이 11월 21일 자로 문을 닫는다는 공식적인 발표와 더불어, 폐쇄를 위한 구체적 계획서가 전달되었다.  


  2007년 9월 19일: 산과, 유방암센터, 심장 외래과, 암센터, 재활 센터가 파산에 따른 결과로 

                           ‘법적 폐쇄’가 승인됨  

  2007년 9월 20일: 방사선 암 센터, 유방암 센터, 심장센터, 재활 센터 예약 중단.   

  2007년 10월 19일: 수술실, 커뮤니티 봉사센터, 메모그램 스크린 예약 중단.  

  2007년 10월 31일: 심장센터 폐쇄.  

  2007년 11월 9일: 외래환자를 위한 모든 검사실, 항암실, 수면 검사실, 피트니스실, 안과 클리닉, 

                           통증 치료 예약 중단. 

  2007년 11월 12일: 산과 병동에 출산 산모 마지막 입원. 커뮤니티에 병원 폐쇄를 정식으로 통고.

  2007년 11월 14일: 응급실 환자, 타 병원으로 이송. 

  2007년 11월 16일: 수술실 폐쇄. 산과 병동 폐쇄. 특별 신생아 병동 폐쇄(필요할 경우 타 병원으로 이송) 

  2007년 11월 19일: 수송 차량 서비스 중단. 당일 수술실 폐쇄. 통증 관리센터 폐쇄. 

                             모든 입원환자 퇴원(필요할 경우 타 병원으로 이송). 

  2007년 11월 21일: 식당, 자원봉사실, 외래 당뇨/전염 염증 센터, 직원 케어, 약국, 서포트 그룹, 

                             중앙 물품센터, 응급실, 한국부 등 폐쇄. 

  2007년 11월 21~30일: 병원 폐쇄.  


패스캑 벨리 병원은 영원히 문을 닫았다. 나는 11월 30일까지 출근하여 모든 폐기할 서류들과 보관해야 할 서류들의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개인 물품들을 챙겼다. 콰앙, 하고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텅 빈 복도 사이사이를 헤치고 울려가는데 그 소리는 마치 타이태닉호의 마지막 물 가르는 소리처럼 음산하고 깊었다. 

수많은 새 생명이 태어나고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을 이 종합 병원의 주차장에서 나는 소리 없이 서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불 꺼진 건물들은 마치 갈 길을 잃어버린 외로운 넋들 같아 보였다. 땅에 구르는 낙엽들이 마치 춤추듯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을씨년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마지막 한 페이지를 넘기는 운명의 장소에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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