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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y 11. 2022

얼(Earl)과 배나무

    어느 해 겨울 성탄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맨해튼의 학교 기숙사에 있는 딸 디디가 전화를 했다. 디디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2주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책방에서 주급을 받은 디디는 지갑이 두둑했다. 그런데 마침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모퉁이에서 마주친 홈리스(노숙자)가 ‘헝그리, 헝그리’하는 것이다. 그냥 가려던 참에 마침 옆에 있는 델리에서 아주 근사한 냄새가 나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던 디디는 다시 돌아가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돈을 줄 수는 없지만, 음식은 사주겠어요. 무엇이 먹고 싶어요?”  

 “파스타, 미트볼 파스타.” 


그는 델리 안 유리창에 진열된 음식들을 가리켰다. 디디가 그에게 ‘여기서 기다리면 내가 사다 주겠다’고 하니까 그는 고맙다면서 ‘탄산음료는 몸에 안 좋으니 야채 주스를 부탁한다’고 했다. 디디는 그가 주문한 미트볼 파스타와 야채 주스를 건네주었다. 

 

 “난 디디예요, 당신 이름은요?”  

 “내 이름은 얼(Earl)이야.”  

 “얼, 즐겁고 좋은 성탄절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 미트볼 파스타로 내 성탄절은 이미 행복해. 디디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가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며 디디는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디디의 행복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천사의 합창 소리가 은은한 무대 위, 흰 눈 내리는 수은등 뿌연 불빛 아래 헐벗은 거지에게 따뜻한 음식을 건네주는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흐르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이후 ‘얼’은 우리의 가슴에 남았다.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 마음이 가 닿는 곳, 그냥 그 존재는 ‘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거실 한편에서 우리의 성탄절을 빛내주고 따뜻하게 해 주던 크리스마스트리도 ‘얼’로 불리게 됐는데, 잘린 나무 밑둥에서 물을 빨아올릴 기력도 쇠잔해져 가며 마른 잎새들을 떨구기 시작할 때 ‘얼’은 장식이 뜯긴 후 집 밖으로 버림을 받게 되었다.  


 “얼, 그동안 고마웠어. 너의 희생으로 우리는 아주 행복한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어. 너도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던 것, 기뻐하며 떠나가.” 


우리는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그다음에 우리에게 온 것이 작은 배나무 ‘얼’이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넓은 들에서 뽑혀온 어린 배나무는 내 어깨 정도의 키에 한 장의 잎사귀도 없이 마치 다듬어지지 않은 지팡이 같은 모양으로, 밑둥 뿌리에 흙을 잔뜩 싸안고 와서 우리 집 앞뜰에 조그만 자리를 얻었다. 배나무가 차지한 앞뜰의 한 귀퉁이는 애초부터 꽃나무들이 질서 정연히 심어지게 계획된 곳이 아니다. 이름 모를 잡초들 사이에 멋없이 큰 소나무 두 그루와 그 옆에서 지저분한 잎사귀를 매달고 영양실조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흰 가지의 작은 나무 한 그루, 땅에 덮인 듯 누워있는 정원수 한 그루, 그리고 매년 가지를 쳐내도 질펀하게 꽃을 피우는 덩굴장미와, 모양으로 갖다 둔 것이 틀림없지만 별 모양 없는 큰 바위 한 개가 전부인 이곳이다. 이 속에 심어진 배나무는 정면인 길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창문으로 집 안에서 내다보면 바로 보였다. 몸통은 여느 지팡이 정도의 굵기인데 가느다란 가지 몇 개를 붙이고 부끄러운 듯 서 있는 모습은 볼품도 없이 가련하게만 보였다.


 “네 이름은 얼(Earl)이야.” 


나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고 사랑을 주었다. 매일 아침 커튼을 열면 눈 부신 햇살 아래 수줍은 듯 서 있는 ‘얼’에게 ‘안녕?’하고 인사하면 그도 기쁜 듯 내게 안녕, 하고 손짓하는 듯했다. 그의 앙상한 가지는 하루씩 날을 더해가며 바람 속에, 빗속에, 그리고 휘날리는 흰 눈 속에서 꿋꿋하게 견디며 강해지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얼었던 땅이 녹아 물기가 흐르고, 풋풋한 연녹색의 옷을 입기 시작하는 어느 봄날 저녁, 나는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마침 보름께였나보다. 요요한 달빛이 흐르는 창밖의 밤은 마치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데 문득 푸릇푸릇 잎새를 달기 시작한 ‘얼’의 가지마다 커다란 흰 눈송이 같은 모습들이 소복소복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하얀 배꽃이었다. 언제 피었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피어난 하얀 배꽃들이 달빛 아래서 그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예쁘고 황홀한 배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여린 푸른 잎새들을 숄처럼 두르고 달빛을 받아 희다 못해 뽀얀 조명을 받은 듯, 마치 막 오른 무대 위 발레리나처럼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 저 꽃들 좀 봐요. 내 앞뜰의 저 가냘픈 나무에 핀 내 배꽃을 좀 보세요.” 


나는 아무나 붙잡고 이 흰 드레스를 걸친 황홀한 발레리나들의 춤의 향연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마치 환상이라 사라져버리면 큰일이기라도 한 듯 오래오래 배꽃을 바라보았다. 그 후 나의 ‘얼’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는가…. 꽃을 떨군 가지마다 조랑조랑 도토리만 한 배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개, 또 한 개가 아니었다.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 신비가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작아도 배나무에서 도토리가 열릴까? 정말 배의 모양을 한 진짜 배들, 그 배들이 소복소복 가지마다 엉켜서 무리 지어 달려 있었다. 흥분하여 자랑하는 내게 한 가지에 하나씩만 남기고 따주어야 제대로 큰다고 주위에서 조언해주었지만 나는 아깝고 귀여워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것들이 하룻밤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올망졸망한 것들이 날을 잡아서 일제히 도망을 간 것일까…. 땅에 떨어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다람쥐나 작은 짐승들, 혹은 새들이 훔쳐 갔을 것으로 판단될 때까지 나는 그 배들을 찾아 헤맸다. 어느 짐승들이 그토록 완벽한 추수를 자행했을 것인가…. 짐작도 할 수 없어 나는 떨어진 조각이라도 찾아보려고 잡초 속까지 뒤졌다. 나의 배들은 하나에 몇천 원씩 한다는 그런 오만하고 잘난 배들이 아니었다. 저희끼리 끼들끼들, 장난치고 떠들어대며 하하, 하고 웃는 나의 귀염둥이었던 것이다. 나의 합창단원이고 무용단원이었던 것이다.


여름내 ‘얼’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도둑맞은 귀염둥이의 슬픔을 늘어뜨리고 허허로운 계절을 지켜냈다. 나는 다시는 아침마다 그에게 ‘안녕’하지 않게 되었고 느닷없이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만 한 큰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얼’을 흘겨보곤 했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을 커튼으로 굳게 닫아 걸었다. 


어느덧 햇살은 계절을 지나쳐 멀어져 가고 따뜻한 햇살이 아쉬운 어느 짙은 가을 아침, 나는 문득 창밖에서 나를 손짓하는 ‘얼’을 보았다. 짙푸른 가을 하늘 아래, 아직도 가느다랗지만, 훨씬 강해 보이는 몸통 줄기 위 가지마다 가을에 물든 노란 잎, 붉은 잎, 오렌지빛 잎, 그리고 아직도 짙푸른 색이 남아있는 잎새들... 한 나뭇가지에 어쩌면 그토록 형형색색의 다른 색깔들이 물들 수 있는지…! 

나는 창문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크고 작은 잎새들은 온갖 저마다 다른 빛깔들을 떨쳐입고 눈부신 아침 햇살의 조명을 받으며 공연을 시작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각자의 악기를 어루만지며, 서로 속삭이며, 춤추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진짜 배나무를 본 적이 없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배의 크기로 미루어볼 때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게 아름드리 큰 나무를 생각했었다. 볼품없게 뿌리만 감춘 흙 주머니를 매달고 온 막대기 같은 곳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어떤 배고픈 짐승의 훌륭한 양식이 되었으리라) 색깔의 퍼레이드로 한 해의 아듀(Adieu)를 고하는 ‘얼’. 가을을 입고 창문 앞에 서 있는 내 작은 배나무 ‘얼’은 뛰어난 한 폭의 수채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카밀, 피사로의 가을 풍경 한 귀퉁이에서 그냥 옮겨 심어진 듯하였다. 


짧아져 가는 가을 햇살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리듯 공연은 끝났는데 차가운 바람을 몰고 온 날씨를 겪으며 ‘얼’은 마지막 투명하게 노란 잎새를 땅에 떨구었다. 하나, 둘, 춤추며 휘날리며 떨어져 내리는 잎새들에서 나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베네딕투스’를 듣고 있었다. 합창 소리는 작아졌다 커지며 끊길 듯 이어져갔는데 마지막 남은 잎새도 멈칫거리지 않고 땅에 떨어져 내리며 나의 연주도 마지막 장을 끝냈다. 나는 공연이 끝난 텅 빈 무대를 바라보는 듯했는데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얼’의 가느다란 가지에는 곧 흰 눈이 내려 쌓이고 모진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그를 후려칠 것이지만, 그의 뿌리는 좀 더 깊은, 따뜻한 곳으로 힘차게 뻗어나가 새로운 잎새와 꽃과 열매를 맺을 채비를 시작하리라는 것을…. 나는 이 깊고 어두운 겨울을 지내는 동안 앙상한 가지만 걸친 ‘얼’에게 나의 소망을 심을 것이다. 미트볼 파스타와 야채 쥬스를 좋아하는 맨해튼의 홈리스 ‘얼’과 그 외 모든 ‘얼’들에게 찬란한 소생의 봄이 찾아와 꽃이 피고 또다시 열매를 맺을 바로 그 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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