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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물선 May 11. 2024

하이쿠/마츠오 바쇼


너와 나의 생애
그 사이엔
벚꽃의 생애가 있다.






마츠오 바쇼(1644-1694)의 하이쿠로 잘 알려져 있는 시구이다. 이 짧은 시구에는 시구를 기능케 하는 기능적, 의미적 요소들 사이의 여백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발생하는 시적 포착, 포획이 있다. 형식적 제약과 시가 포착하는 세계의 범위 사이의 간극 탓에 시의 표면에 구체성 있는 이미지가 제시되고 있지는 지만, ‘너’와 ‘나’, ‘생애’와 ‘벚꽃’ 그리고 ‘사이’라는 큼직한 시어들이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시적 세계의 경계를 포획해 걸어내고 있다. 이처럼 단어들 사이의 넓은 보폭에도 불구하고 이 하이쿠는 관념의 감각화된 시적 영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너와 나의 생애 그 사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시작된다. 생애는 시간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기실 너와 나의 생애는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르게 흘러간다. 개별주체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성을 감각하며, 이를 길게 늘어뜨리면 '생애'라는 선형적 시간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우연히도 그러한 둘의 생애 일부가 공통된 시간의 궤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실감, 시간감각을 만들어내는 순간-함께 산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처럼- 화자는 마치 그러한 시간 개념의 생애가 겹쳐 있는 듯한 공간성을 획득한 것처럼 감각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이’라는 시어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너와 내가 병존하고 있는 그 ‘사이’에 벚꽃의 생애도 존재하고 있다고 언술 한다. 사실 그곳엔 '벚꽃의 생애'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벚꽃의 찰나적 존재가 있다. 하지만 존재들의 생애가 반영적으로 투사된 현실의 공통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면,  밴다이어그램의 공통항처럼 '이 순간의 공통항'에 너와 내가 함께 매개하는 존재의 인식항이 ‘벚꽃’이 되는 일이 발생해 버린 그 현실이 지금이라면, 그 너머엔 벚꽃의 생애도 존재한다는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벚꽃’이라는 시어가 환기하는 가시적, 비가시적 파장(봄, 찰나성, 유한성, 낙하, 아름다움, 고전미, 생명성 등)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너와 나의 관계, 그리고 너와 나라는 존재의 되비침이 벚꽃에 매개되어 드러나게 된다. 벚꽃에 비치는 생애는 너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기실 다르게 비치지 않는다. 벚꽃이라는 동일물로 매개된 속성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속성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마치 너와 나의 생 또한 여러 벚꽃무리들 중 하나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루프백 기전을 야기하여 되돌이 지시 효과를 발생시킨다. 즉, 벚꽃이 너와 나의 공통된 존재인식의 매개항으로 기능하다가, 벚꽃고유의 파장(속성)이 너와 나에게 존재의 속성으로 되비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적 욕망과 관련하여 조금 더 이야기를 진전시켜 볼 수 있다. 이 하이쿠에 드러난 시적 인식은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 생명과 죽음, 영원과 찰나와 같은 이분법적 존재론의 관념에 대한 초월적 지향을 담고 있어 보이기도 한다. 너와 나의 생애는 단선적이며 그 처음과 끝이 명확한 선분과 같은 유한한 생애라 할 수 있다. 벚꽃의 생애는 일견 봄의 한철, 짧은 기간 피고지는 벚꽃의 속성과 낙화의 이미지로 인해 이러한 찰나성을 효과적으로 매개하는 보인다. 하지만, 벚꽃은 기실 무한한 순환성을 상징하는 생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벚꽃의 생성과 소멸은 자연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성에 대한 우리 자아의 투사적 욕망이 근원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자문해보면 명확하다. 우리는 벚꽃의 소멸을 보는가 벚꽃의 순환을 보는가. 우리는 순환 속, 주기 속의 소멸을 보기 때문에 벚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리라. 이는 순환성이라는 세계감각에 대한 주체의 열린 인식이 드러나는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시의 관점은 존재(시적주체)가 세계(인식대상)를 주체의 내부로 포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속에서 포섭된 세계를 인식하고 사실은 그 세계가 존재를 내포하고 있는 더 큰 세계인 것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열린 고리의 구조, 마치 블랙홀-웜홀과 같은 구조의 시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존재자의 거대한 고독이 우주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누군가는 이것이 위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는 모두 연결된 것이라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깨달음으로 위장된 선문답이거나 합일을 지향하는 존재론적 불안의 문학적 해소나 마취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다고(혹은 종종 의미의 전유를 통해 바람이 불어온다고 그 시가 강변한다고 해서) 그곳에 비상구가 열려있다는 법은 없다. 시적 화자는 그저 그러한 인식과 감각을 지녔고 그러한 시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진술이 실존적인 진실을 담지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성의 진실이 귀속될 수 있는 더 커다란 가능성의 개념을 감각하게 해 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한다. 이것은 얼핏 우스운 비유지만 정글에서 헤매던 주체가 스스로의 고통을 감각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실감하다가 어느 순간 덤불을 헤치고 갑자기 커다란 폭포를 마주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폭포가 도대체 지금 이 순간 인생에서, 정글 속에서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나 마치 그런 깨달음과 닮은 감각,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가 어떤 더욱 커다란 원리나 섭리, 그 앞에 서 있다는 자각을 할 때 세계와 그 세계 속에 실존하는 나 사이에는 발생하는 감각이 있다. 그것을 느끼는 주체는 절대 마비된 주체가 아니다. 시적욕망, 우리의 욕망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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