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MUZN Nov 07. 2022

아빠의 기일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아빠를 보러 가는 날은 항상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동생과 나는 뜨겁다 못해 우리를 태울 것 같은 햇살을 등지고 아빠한테 인사를 한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바꿔서 또 한 번, 두 번. 할아버지는 아빠한테 인사하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에게 해줄 말이 없다. 듣고 싶은 말은 많은데, 죽은 이는 말이 없다지 않나.


이마로 땅을 짚고 속으로 하나, 둘, 셋, 넷, 다섯을 센다. 약주에서 익숙한 아빠 냄새가 난다. 아빠를 살리고 죽이던 술. 술잔을 치느라 내 손에도 술냄새가 베인다. 할머니에게도 '우리 왔어!(할아버지식 표현)'라고 인사하고 나면, 돗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사과와 배를 깎아 먹고 제를 지낸 떡을 먹는다. 올해는 송편과 절편을 샀다. 동생이랑 내가 좋아하는 떡이다. 아빠는 어떤 떡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떡을 좋아하긴 했을까. 아빠는 겨울이면 호빵을, 붕어빵을, 국화빵을, 어묵을 잔뜩 싸왔는데, 떡을 사온 적은 없었다. 과일은 정말 좋아했다. 사과, 배, 귤, 단감, 포도. 냉장고를 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과일이 잔뜩 있었다. 살아서 그렇게 좋아했으니 죽어서도 좋아할까. 진짜 와서 먹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제사상에 올려는 본다. 와서 제사 음식을 먹을 거라 상상하면 덜 외로운 기분이다.


아빠가 돌아 가신지 벌써 6년이다. 6년 사이에 나는 많이 변했다. 나라는 사람의 성격도, 마음도, 관계도, 세상도 변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올해의 나를 아빠가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아빠, 나 밥 벌이 하고 살고 있어! 운전을 해준 아주머니는 '딸들이 이제 장성 했는데, 같이 여행다니며 말년을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신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감정은 없다.


올해의 노벨 문학상은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에게 돌아갔다. 아니 에르노라는 소식을 듣자 마자 바로 '얼어붙은 여자'를 다시 꺼내봤다. 책을 읽을 땐 그렇게 대단하게 안 느껴졌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이라니 괜히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작가의 다른 책들을 둘러보다가, '남자의 자리'라는 책을 샀다. 학교에서 교직원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서 구매 할인 혜택을 주는데, 뭐라도 살까 고민을 하다가 남자의 자리를 샀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작가가 쓴 아빠에 대한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남자의 자리를 다 읽었다. 읽으면서 아니 에르노의 아빠를 생각하고, 그녀의 아빠를 보는 아니 에르노를 생각하고, 동시에 나와 아빠를 생각했다. 나도 아니 에르노처럼 아빠에 대한 회고록을 적어보고 싶다.


그게 이 글을 시작한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 번외2. 당신은 사실 사랑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