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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Nov 12. 2022

논고동 무침과 추어탕

모내기

오늘 간 추어탕집은 논고동 무침을 판다. 도시에 온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 고동이라는 저 이름을 메뉴판에서 본 건 처음이다. 논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논고동을 구하는 건지. 추어탕을 못 먹는 후배를 위해 논고동 무침을 시켰다. "미꾸라지를 집에서 손질하는 걸 본 적 있어서 너무 끔찍하기도 하고, 뼈를 잘 못 삼켜서 추어탕을 먹을 때면 갈린 미꾸라지뼈가 목에 콱 걸려서 못 먹겠어요." 

추어탕을 못 먹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측은한 표정이 지어진다. 이 진득하고 시원하고 맛깔나는 추어탕을 함께 즐길 수 없다니. 나는 호불호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기억이 안 날 만큼 어릴 때부터 추어탕을 먹었다. 모내기를 하는 5월이면 아빠와 삼촌들은 할아버지 댁에 모여 아침부터 일을 하고, 논에 있는 고동과 미꾸라지를 잡아 왔다. 아빠는 창이 있고 뒤에 그물망이 길게 늘여진 모자를 쓰고, 팔토시를 하고,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논으로 갔다. 집에서 티비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놀고 있다보면 금세 아빠가 돌아왔다. 논에서 돌아오는 아빠의 장화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진흙발자국이 남았다. 지친 손에는 그물망이 쥐어져 있었다. 그물망에는 고동,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걸 받아서 고동무침도 하고 추어탕도 끓였다. 

할머니가 고동을 삶으면, 나는 할아버지랑 앉아서 이쑤시개로 껍데기에서 살을 빼냈다. 고동이 중간에 끊기지 않고 쏙 뽑혀 나올 수 있게 힘을 너무 강하게 주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 동안 할머니는 미꾸라지를 손질했고, 아빠와 삼촌들은 샤워를 했다. 추어탕을 끓일 때면 미꾸라지를, 백숙을 끓일 때면 닭을 할머니는 마당에서 직접 손질했다. 손질을 직접 본 적은 없다. 호기심이 일법도 한데, 마당에 나가보는 게 무서웠다. 특히 닭을 죽이고 손질할 때 타이밍을 잘 못 맞추면 마당에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바닥에 피가 흥건했는데 그 장면이 너무 소름돋아 항상 곁눈질로 보고 도망가기 바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말해주기를 내가 한번 고라니를 보고 기절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빠가 대구에 가는 고속도로에서 로드킬 당한 고라니를 보고 트럭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고라니를 먹으려고 마당에서 가죽을 벗기는 걸 어린 내가 보고는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는 거다. 할머니는 난리가 나서 당장 고라니를 버리고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나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데, 그 경험이 무의식에 남아 여전히 죽은 동물을 보는 게 무서운 걸까. 


시골의 5월은 꽤 더웠다. 우리는 에어컨이 없었고, 선풍기 3대에 의지해야 했다. 하얀 아빠는 논에 다녀올 때마다 까매졌다. 아빠는 샤워를 했는데도 추어탕 앞에서는 땀을 뻘뻘 흘렸다. 할머니는 아빠 목에 수건을 둘러주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내기는 힘들지 않았니, 많이 덥지 않니, 간은 맞니, 밥 먹고는 뭐 할거니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엄마, 이거 좀 더도.", "진아 물 좀 떠와라."같은 말만 나왔을 뿐이다. 


상추, 양파, 오이 등과 함께 무친 고동은 별미였다. 고동은 탱글탱글했고, 양념은 새콤달콤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추어탕은 내가 지금껏 바깥에서 먹은 추어탕 맛과 다르다. 어느 추어탕집도 필순할매처럼 추어탕을 끓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미꾸라지를 곱게 갈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그 편이 씹는 맛이 있어 좋다고 했다. "작은집(할아버지 동생의 부인)은 미꾸라지를 아주 곱게 간다고, 그게 나는 별로야. 씹는 맛이 없잖아!" 미꾸라지 살은 야들야들했고, 뼈는 오독오독했다. 아빠는 식탁에서 항상 음식 먹는 법을 알려줬다. 이건 이렇게 먹어야 맛있고, 쌈은 이렇게 싸서 먹어야 맛있다. 같은 조언이었다. 삼겹살을 먹으러 가면 고기 굽는 법도 알려줬는데, "구울 줄 알아야 맛있게 먹을 줄도 아는 거야."라고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아빠에 따르면 추어탕은 산초를 뿌려 먹어야 했다. 아빠는 자신의 맛있게 먹는 법을 내게 전수해 주고 나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폈다. '맛있지?'라고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맛있다고 했다. 아빠랑 어색해서 그렇게 반응 했을 뿐, 사실 정말 맛있었다. 나는 산초의 존재감이 좋았다. 산초는 추어탕 맛의 판도를 바꿔 놓는 존재였다. 어른들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나의 마음을 내 행동으로 추론했다. 내가 밥 그릇을 싹싹 비울 때면 가족들은 "아이고 우리 진이가 맛있었나보네."하며 흐뭇해하고 좋아했다. 그럼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방으로 도망갔다. 


점심을 먹고 나면, 마당에 아빠가 남겨둔 진흙 발자국이 5월의 햇살에 굳혀져 있었다. 그럼 나는 그 발자국을 발로 차며 가루로 만들며 놀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티비를 보고,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자전거를 탔다. 나는 농사일을 도운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아빠와 삼촌들은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너무 많이 도와서, 그래서 농사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서 도망쳤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들들은 그렇게 멀어졌다.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의 노동자가 되어주길 바라고, 아들들은 대가없는 노동에 자신의 젊음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장남으로써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오기로 보란듯이 성공해보이고 싶어 했다.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만큼 나 스스로 성공해보이겠다고. 하지만 아빠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빠가 실패할 때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섰다. 아빠가 죽는 그 날까지도, 할아버지가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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