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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Feb 10. 2022

두려움의 진화

도태에 대한 두려움

어려서부터 성취, 성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비슷한 무리들을 따돌려 안정권 위치에 도달해야 하지 못한다면 도태되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였다. 평생을 시달리면서도 이해가 안 되었다. 일단 정신건강 관련 책에서 잘 이야기하는 주제도 아닌 데다가 이건 갓난아기 때부터 주입된 생각이라기엔 너무 사회화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이런 모양을 갖췄는지 써보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에 일어났다. 당시에 난 점수를 잘 받아왔다. 6년 내내 나는 90점대를 유지를 했는데 1, 2 학년 때는 100점도 줄 곧 잘 받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 올백을 맞은 적도 있었으니 툭까 놓고 봐도 잘 하긴 잘했다. 내가 이런 아이의 엄마였다면 뷔페를 연달아 데려가고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항상 나에게 '올백 맞았으니 이제 다 온 거 같지? 앞으로가 더 문제야. 더 신경을 써야 밑에 있는 애들이 치고 올라오질 않지.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란 말을 했다. 선물은커녕 칭찬도 못 받았고 그냥 인정 자체를 못 받았다.


이제야 보인다. 그 여자의 말은 결국 '올백 그까짓 거 뭐가 대단하다고 내 앞에서 자랑질이냐. 건너 건너 다른 아이들도 다 받아 올만큼 그렇게 흔한 거 지금 한번 했다고 으스대는데 꼴도 보기 싫다. 그렇다고 네가 계속 올백을 받을 거 같니?'라는 뜻이었다. 불로소득을 얻은 것도 아니고 정당히 노력해서 결실을 맺었으니 부모 다운 사랑을 달라는 것인데 그런 것조차도 자랑질 같아 아니꼬워 보였기에 그 노력조차 자근자근 밟아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자식의 얼굴이 밝아지는 거 자체로도 자신의 심사가 뒤틀리는 인간이었고 남에게 직설을 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애한테 자신의 심기가 상했다는 말조차 그렇게 돌려서 밖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학년 아동이 말의 뉘앙스 자체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이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었다. 내가 받은 올백점은 언젠가 다른 아이의 차지가 될 수 있단 두려움으로 시험에 임했다. 아마도 그 시기부터 점수상으로 '내 밑에 있는 아이들'을 견제 하기 시작했고 이들과의 격차를 벌려 놓는 것이 내 학창 시절의 전부가 되었다. 시험운이 있는 건지 공부머리가 있는 건진 몰라도 공부를 하면 번번이 점수가 잘 나왔기에 엄마의 말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대강 좋은 결실을 얻으니 엄마에게선 칭찬을 듣질 못해도 이게 내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이라고 여기고 살아온 거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엄마는 중학교 중퇴자이다. 본인의 능력에 대한 커다란 콤플렉스가 있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가방끈이 짧단 인정을 할 줄 알아야 검정고시를 보는 노력이라도 해서 자신의 삶을 좀 더 바꿔 볼 텐데. 그 여자는 그냥 남들에게 자신의 학력을 부풀려 말하는 법을 택했다. 그 지독한 패배의식이 그 여자를 그렇게 젊었을 적 천대하던 무식한 일용직 근로자로 살아가게 끔 만들어 버렸다. 이 여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점수는 항상 올백이었는데 아무래도 본인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본 적도 없고 교육 시스템에 대한 관심도 개념 자체가 없으니 그냥 그렇게 넘겨짚어 놓고 그게 마치 법인 거 마냥 굴었던 거 같다. 만약 아이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면 그 여자의 무식함이 아이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뉴스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되고 싶은 롤모델을 찾고 학교 내에서 잘 나가는 아이들을 선망하며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귀여운 질투도 할 법한데 나는 그렇질 못했다. 과학고에 붙었다는 동네 언니도 부럽지 않았고 아이큐가 140에 전교 1등을 하는 아이의 자리도 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수재로 태어난 데다가 가족에게서 서포트를 다 받을 테니 나랑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오로지 견제하고 격차를 벌리고자 전념했던 건 나랑 비슷 한 사람들, 아니면 수치상으로 나보다 좀 더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중학교 올라갈 시점 부모는 아무런 계획 없이 호주로 이민을 결심했고 나는 소통의 자유를 잃었다. 거기서 말이 통하는 한국인 무리를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쯤 나는 어떤 아이가 주도한 은따로 인해 한국 학생들에게서 배척을 두 번 당했다. 한 번은 랭귀지 스쿨에서 그리고 그 후년에는 다니던 하이스쿨에서였다. 나는 배신을 당하고도 받아주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이내 다른 한국 아이들이 무리에 들어오자 그 애는 똑같은 방법으로 나를 무리에서 배척시켰다. 그 아이도 나르시시스트였었다. 내 엄마와 같이 남의 입에서 혀처럼 굴다가 뒤통수를 치는 타입이었으며 그냥 무리에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싶으면 어떤 아이를 몰아세워 배척시키고 그런 패턴으로 관계를 맺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나는 바깥세상인 학교에서 엄마의 복사판에게 당했다. 이는 훗날 내가 20대 후반 즈음에 엄마가 자신의 친구 무리에서 어떻게 자기보다 돈 많은 사모님을 왕따를 시켰는지 나에게 자랑을 할 때 비로소 깨달았었고 소름이 끼쳤었던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숨 쉬듯 은따를 하는 아이였고 그게 내가 따돌림을 당한 단순한 이유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나는 빠른 년생에 한 학년도 꿇지 않고 하이스쿨에 들어갔고 그 아이는 일 년을 꿇고 내 학년으로 들어왔으니 나보다 딱 두 살 더 나이가 많은데도 학교에서 나랑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과체중에 호감 가는 인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 아이가 표면적으로는 나보다 꿀린다는 점을 엄마는 아주 잘 파고들었다. 일단 내가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이 골칫거리니까 그걸 무마하기 위해 그 아이와 그 엄마에게 내가 사과해야 한다고 종용을 하더니 내가 절대로 굽히지 않으니 그때서야 그 아이가 나에게 엄청난 콤플렉스를 느껴서 질투심에 나를 배신한 거라 노래를 해대기 시작했다. 내가 은따의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엄마는 또 그 애 얘기를 꺼내면서 내 상처에 소금을 뿌려댔다. 아마도 그때 '잘 나지도 않았으면서 질투 많은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라는 공식이 내 머리에 박힌 거 같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불법체류 신세에 돈도 없었고 학교를 옮길 수 없으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저 못나고 샘 많은 인간들을 평생 볼일이 없을 정도로 잘 되어야 한다라고 결심했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 인간들을 보면 자동적으로 내 머리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내가 처한 위치에서 더 좋은 곳으로 벗어나 저들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위기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나의 공포는 이렇게 여러 단계로 진화를 했구나.


어릴 적 나는 그저 내가 무언가를 하고 그걸 보여줌으로써 부모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단 단순한 소망이 있었다. 나는 유령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였기에 그걸 어떻게 해서든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 누구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에게 있어 죽음의 기로에서 서는 것과 같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해서 인정을 받고자 했던 것이고.


엄마는 내 순진한 소망을 짓밟는 것도 모자라 남을 견제하고 그들을 밟고 올라서야 내 존재를 인정해주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엄마의 요구를 들어줄 순 없었기에 난 정당한 방식으로 월등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했지만 커갈수록 그 월등함의 벽은 높아만 갔다. 언어적 장벽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말이다. 이 공포는 20년에 걸쳐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다 갉아먹었고 대학 때 나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렇게 '도태된 상태'를 온몸으로 우박을 맞듯 처절히 견뎌내고 20대 중반에 다시 일어서기 시작해 삶의 성취를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하자 그 두려움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나르시시스트 소굴이었다. 그곳이 지옥 같았기에 이직을 결심했고 이제야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곳으로 옮겼다고 생각해 안도의 숨을 돌렸다. 그런데 전 직장에서 눈엣 가시였던 애들, 특히 내 경력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애들이 내가 다니는 직장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나와 같은 직함으로 같은 호봉까지 받는 게 아닌가. 화가 나는 것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어릴 적 올백을 맞아 엄마에게 칭찬을 받을 꺼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방심을 하니까 내 성취를 뺏기는구나. 내 성취를 빼앗긴 상황이 전혀 아닌데 내 성취가 남들과 비교했을 때 그 빛을 잃었다는 것 만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다.


내가 성공하는 만큼 남이 뒤쳐져야 나에겐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이 되는 것이었다. 모두 다 다 잘되면 내 성공이 돋보이지 않으니까. 엄마란 인간이 말하는 이 약육강식, 정글과 같은 세상에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늘 좌절감을 느꼈고 항상 저 먼치 남들이 뒤쳐지는 것을 보고 왜 안심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죄책감에도 시달렸다. 왜 내가 잘 되었는데 남들이 얼마큼 와있는지 염탐을 하고 벌어진 격차를 실감을 해서야 안도의 한숨을 돌릴까? 단순히 나 또한 엄마처럼 패배의식과 시기 질투가 많은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오해했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나도 엄마와 같이 그저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자기 비하를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상처를 몰라보고 나 자신을 몰아세우기 급급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해진다.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맨손으로 나 스스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본질적으로 내 엄마랑은 너무나 다른 사람인 걸 잘 모르고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에겐 목표라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 에게서 위협을 감지하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저 피하는 것으론 전혀 안식을 주지 못했기에 성공을 해 좀 더 나은 곳으로 벗어나야 했다. 내 인생은 뒤에 따라오는 이들을 견제하며 뒷걸음질로 뛰는 마라톤 경주 같았다. 목표를 두고 그것을 만끽하는 상상을 하면 노력을 하면서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던데. 과거의 나는 안쓰럽게도 그 달콤함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거다.


내가 자란 환경과 내가 살아온 과거는 성취감의 뜻조차 왜곡시켜버렸다. 성취는 스스로의 만족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를 비교할 때 나왔다. 이렇게 엄마의 그 얕디 얕고 치졸한 관점에 물이 들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리고 분하다. 바깥에 보이는 것만을 신경 쓰는 그런 한심한 인간이었으니 그 여자한테는 비교만이 세상과 본인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테고.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것은 삶에 있어서 성공, 성취라는 개념이 더 이상은 절대 평가적 성적표가 아닌 직장, 직함, 학벌, 결혼 상대, 자산, 집안 배경, 생김새, 인복 이런 내가 어찌할 수가 없는 팩터들이 더해지면서 더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삶이 없고 한 부분이 있다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슬럼프가 찾아 올 정도로 삶의 구조는 앙상하고 조약 한 것들이 빽빽하게 얽혀있다.


나보다 승진을 빨리 했어도 젊은 나이에 아이를 줄줄이 낳는 바람에 본인 월급만으로는 빠듯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고, 학벌이 좋아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커리어에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있고, 학벌이 안 좋은데 혼자 자수성가를 하는 경우도, 바닥을 기는 성적이었어도 부모 돈으로 사장이 되는 경우도 있고, 승승장구하는 거 같아도 여러 번 이혼을 당해서 전문직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 그 애 다섯 딸린 사람?'이라고 무시당하는 경우도 줄 곧 있다.


나이가 들면 이제 자식 농사 망하고 성공한 케이스, 부모 유산이나 가족의 불화, 지병, 죽음 때문에 골머리를 앓거나 아예 인생이 바뀌는 사람들까지 다 보이기 시작하겠지. 내 삶의 고비는 어떻게 내 노하우로 뚫고 지나갈 텐데 남들의 생각을 탑재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건 차마 상상조차도 못하겠고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엄두도 안 나서 결국 그 누구의 삶도 안 부러워지게 된다.


만약 내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건강한 마인드로 잘 살았을 수도 있었기에 그 박탈감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적이 있다. 트라우마가 플래시백으로 발현되면서 내 정신을 너무 갉아먹으니까. 하지만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 나에 비해 매사에 안이해졌을 것 같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마인드가 비정상인 사람들을 첫 등장부터 알아채리는 건 쉽지 않다. 그런 걸 직접 겪고 고통받지 않아 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타인의 바운더리를 제 집처럼 넘나드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고 일이 안 좋게 돌아가는 징조 또한 모른다.


나에게 있어 트라우마는 양날의 검이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았지만 이상한 낌새는 잘 알아차리기 때문에 어른이 된 후 문제 있는 사람들과 특히 이성적으로 깊이 발전하는 상황이 전혀 없었고 상담을 시작하고 관련 지식을 찾아보면서 더 이상 이런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저 내 바운더리만 지키는 걸 자동적으로 습득했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바운더리를 없애고 다니는 그런 포식자들을 알아차리는 법부터 어쩔 수 없이 습득했고 바운더리를 지키는 법을 후천적으로 익히고 있는 샘이다. 결과적으로 배움의 순서만 뒤 바뀌었을 뿐이라는 걸 이해하면서 저 너머의 삶에 대한 동경도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비교의 잣대도 무엇인지 불분명해지고 무의미 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어릴 적 공포가 매번 드리우는 건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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