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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May 20. 2022

병동에서의 시간이 트라우마가 될 줄은- 2

이어서 써 내려가는 내용은 병동 생활 마무리를 지으며 느낀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왜 이 경험이 긴긴 시간 동안 엄청난 트라우마 그 자체로 남았는가 이다.


정신병원에서 조차도 나는 내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점은 나를 고통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유인즉슨 엄마와 그 혈육들이 본인의 가족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워 오랫동안 감금을 했던 전력이 있었고 그런 배경에서 자라난 엄마라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나 또한 그 제물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할머니의 막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친구에 대한 집착이 정말 심했다. 누군가가 그녀와 친하게 지내다가도 그녀가 부담스럽게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 들어 그녀를 멀리하려 들면 고통스러워하고 그 분노를 심하게 표출했는데 정확한 진단명은 모르겠지만 아주 전형적인 경계선 성격장애의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적어도 60,70년대였으니 성격장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가족은 그냥 매번 강제로 감금을 해버렸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수시로 강제입원만 당하고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기에 그녀의 삶은 피폐해졌고 결국 자립을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아흔이 넘은 엄마에게 의존해서 살다가 혼자가 되어버리자 형제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것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던 나는 강제입원에 대한 두려움밖에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앞 글에서 우울증이 아주 심각해지면 환각 또는 환청이 들린다고 하는데 보통 이런 것에 빠삭한 전문가들은 대부분 항우울증으로 적절히 치료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증상이라고 소개를 한다. 조현적 에피소드는 조현병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 나는 항정신제를 같이 처방을 받았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마치 조현병의 내력을 내려받아 이런 약을 먹게 된 것인지 더욱더 의문을 가지게 했다. 대대로 외가 쪽엔 가정폭력과 정서적 학대로 인한 인격장애와 우울증이 대물림 되었지만 조현병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런 걸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쉽게 휩쓸려 다니긴 했지만.  


그 누구도 학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로 인한 불안이나 우울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전문지식을 직접 접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게다가 가족이 그 가해를 입히고 있다면 피해자는 의료 서비스 접근도 불가능하다. 내 부모 또한 내 우울증에 대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국립 의료 서비스는 조약 하기 따로 없었다. 병동에 갇혀 있었던 두 달 동안 두어 번 내지 환자들이 모여서 공작 놀이 같은 것을 하고 막바지에 들어 간호사 동행하에 바깥 잔디를 거닌 게 전부이다. 1:1도 아니고 단체로 통솔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때운 시간이 두 달 동안 3시간 이하였다는 소리이다. 심리 상담 같은 건 전혀 없었고 한주에 한번 왕진오는 registrar와의 만남은 10분 미만이었으며 감옥에서 가석방 심사를 받는 것과 같았다.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은 시간을 때울만한 액세서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거실과 오락실은 시간에 제한이 있었기에 대부분 그냥 먼 곳을 응시하며 걷는 것으로 충당했다.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엔 항상 똥칠이 되어 있었던 건 덤이었고 말이다.


윗것을 다 종합해 보니 병동으로 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곳으로 자리 잡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7년 후 우울이 다시 왔을 때 심리상담에 내 사활을 걸게 된 계기도 이것이다.


퇴원을 하고 정기적으로 인근 병원에 와서 체크를 해야 한다길래 4년 내지 그렇게 했다. 부모는 어떤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병실까지 찾아와 샅샅이 뒤지고 왕진 온 의사 옆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모든 걸 직관하던 그런 모습은 온 데 간데없었고 말이다. 상담사들이 케이스를 전담 맡아 관리를 했고 내가 복용하는 약을 가정의 (GP)를 따로 만나서 처방받을 필요는 없다길래 그냥 상담사를 통해 매번 처방전을 건네받았다. 그 4년 동안 신경정신과 의사를 딱 한번 봤는데 나에게 복용하는 항정신성약 때문에 젖몸살 같은 게 있냐는 말에 아니라는 답을 했고 피검사를 하자는 얘기로 끝이었다. 그땐 어떤 상식도 없고 그냥 그러겠거니 싶어 내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항정신성약을 6년가량 먹었다. 환청 상태는 이미 병동에 있을 당시 다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걸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다.


내가 취직을 했다는 얘기를 끝으로 두세 달에 한번 정도로 진행되던 병원에서의 정기 검진은 끝났고 나는 그냥 내가 정상인의 삶으로 되돌아 가는 셈 쳤다. 병동에서 받았던 처방전은 가정의한테 연계되어 그냥 점차 점차 줄여 나갔다. 그 당시 부모가 추방당하고 나서 남겨진 삶을 다 정리하고 취직까지 해서 일을 하는 바람에 상담을 받는다는 여유는 가질 수 없었다. 불안은 그저 대외활동을 함으로써 잊어버렸다. 종교활동을 하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몸을 혹사시키니 고민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퇴원 후 근 7년 동안 그렇게 버텼다. 이 시기를 치유 과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내 내면의 독백을 아예 차단을 시켜버린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들이 종교활동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극복하네 이러지만 너무나 얕은 생각이다. 종교로 치유를 결심하기 전에 내가 종교에 귀의해서 하는 주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종교 활동에서 소위 봉사라는 것을 하면서 이리저리 물리적인 에너지를 쏟고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정신을 팔고 다니는 것은 내 내면의 문제에서 도망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을 버린 후 치유를 방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트라우마로 인해 내면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처는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게 험난한 삶을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목적이자 숙명이다. 나 자신과의 대화는 어떤 방해 요소가 없는 그런 환경에서 생기는 것이다. 독백이라는 것은 굳이 종교가 필요가 없다. 어떤 종교는 도움을 주지만 내 종교는 그걸 방해했다. 나에게 별 의미도 없는 기도문을 외우며 묵주를 수만 번을 돌렸지만 그것 또한 간간히 올라오는 트라우마의 파편을 눌러 어둠 속에 가두는 방어기제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모태신앙을 버리고 나서 내면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퇴원 후 몇 년간 내 정신이 온전하지 않고 내 지능이 퇴화해서 정신병자 낙인이 찍힐까 봐 전전긍긍했다. 쓰잘 떼기 없는 MRI도 찍었고 인지능력 상승시키는 프로그램 같은걸 매일 했고 말이다. 12년이 지난 후에 나는 기억력 감퇴, 인지능력 저하 이것 또한 일시적이라는 걸 알았고 말이다. 30대에 들어서 내 정보 처리력은 속도가 더 붙었으면 붙었지 낮아지진 않았다. 우울증 때문에 인지 저하를 고민하고 있다면 크게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전문가가 그 얘기를 그때 나에게 해줬다면 좋지 않았을 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주 웃긴   처음 진단명이 major depression with a psychotic episode라고 해서 간간히 보던 한국 가정의 마저도 퇴원 7  (부모가 집을 사자고 나를 쪼아대는 바람에) 내가 약간의 우울감이 있다고 하니  약을 다시 먹어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이미 먹고 있는 항우울제 용량이 낮으니 올려보자는 얘기 보단 당신이 조현 병력이 있는  같으니 6개월 고생해서 끊은 약을 다시 시작해 보자는 그런 어이없는 말을 했던 것이다. Risperidone 시작했던 2009년에  3개월을 날려 보냈다. 안면 마비가 와서 바깥출입을 못했고  후로도 6개월 동안 입에서 침이 흐르는  막을  없어서 고생을 했다.


나는 양약, 의료과학을 굉장히 신뢰하고 의사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편이지만 그 의사는 그 이후로 다시 보지 않았다. 아직도 후회는 안 한다. 상담을 하고 좀 더 구체화된 의료 조언을 얻으면 얻을수록 10년 전에도 내겐 항정신 성약이 필수였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필요 없었던 약을 왜 굳이 내 일상을 파괴하면서 먹어야 하는 것인가? 환자도 하루 24시간 동안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게 있다.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그동안 환자에게 어떠한 경과가 있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10년 전 진단명에 의존해 약을 남발하는 이런 행태는 근절돼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10년이 넘은 일이라서 그런지 호주의 의료시스템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내 문제에 핵심에 관여한 도움은 받지 못했다. 환자의 경과에 대해 의료진들은 관심이 없었고 우울증 환자가 사회에 다시 복귀하기 위해 가질만한 걱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냥 인력난을 약으로 대체하는데 급급했지 않나 싶다.


병동에서의 생활을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이렇게 바닥의 끝을 찍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이 반복되는 삶을 죽음보다 두려워하지 못했을 거란 거다. 최악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 결심을 한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사회적으로도 자족이 가능하고, 나 스스로 엄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깊어진 후 제대로 된 치료를 시작을 했다.


CPTSD 치유 과정엔 단계가 항상 있다.

버티는 것 - 가해자에게서 분리 - 치유로 새 삶을 되찾음.


이것을 surviving (살아남는 과정)에서 thriving (꽃 피우는 과정)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하는데 나는 살아남는 과정을 어찌 보면 30 초반인 재작년쯤에 마쳤다. 20대 후반 나는 병원을 더 이상 들락날락 안 거리고 직장 생활을 한다고 해서 나아졌다고 한 숨을 돌렸지만 그때도 나는 그냥 살아 남기 위해 버티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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