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광펜 Sep 21. 2022

외신기자에서 삼성전자, 아마존까지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왕따 (1)

미국 생활 중간에 잠깐 귀국했던 기억이 있던 탓인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어렵게나마 사귄 미국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고, 잦은 이사 탓에 정서적 안정을 갈구하던 나는 우리 가족에게 또 큰 변화가 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선택권이 없었고 아시아 외환위기의 후폭풍으로 한국이 들끓고 있던 1998년이 끝날 무렵, 우리 가족 모두 또다시 안양 친가에 얹혀살게 된다. 


아버지는 각종 장학금에 의지하며 유학생활을 이어나간 탓에 우리 가족에겐 큰돈이랄 것이 없었다. 할머니 집에 방이 세 개였는데, 큰 안방을 할머니가 사용하고 남은 두 작은 방을 우리 가족에게 내어주었다. 하나는 동생과 나, 하나는 부모님이. 가끔 할머니가 안방에서 함께 자자고 제안했지만, 우리 엄마에게 늘 차갑고 못살게 했던 할머니가 싫어 나는 거절했다.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여자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의 엄격한 두발, 교복 관련 규정은 내가 미국에서 누렸던 자유가 얼마나 컸는지 더욱 상기시켜주기만 했다. 곱슬머리인 나에게 귀밑 3센티 단발머리라니, 가혹했다. 하지만 진짜 가혹했던 건 학교 생활이었다. 그 당시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은 전교에 나 한 명뿐이었고 학교 아이들은 내 한국말이 "꼬부랑거린다"며 웃고 나를 원숭이 보듯이 했다. 


그 당시 내가 한국말을 굉장히 못해 의사소통도 어려웠다. 등교 첫날 담임선생이 미국에서 대통령상을 어떻게 받았냐고 아이들 앞에서 물어봐 나는 꾸벅 인사하면서 상을 받는 시늉을 했다. 반 학생들이 웃음보가 터지고 나는 당황하자, 담임은 그제야 "뭘 어떻게 해서 상을 받게 됐는지 설명해달라"라고 재차 물어봤다. 


내가 미국에서 왔으니 담임과 영어 선생은 매일 아침 조회 전 아이들에게 반 앞에서 영어교과서를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냐며 실행에 옮겼다. 아이들은 당연히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잘난척한다고 몇 명은 나를 대놓고 미워했다. 소위 말하는 '일진' 아이들은 내가 없는 틈을 타 내 책상에 영어 욕을 칼로 파내기도 했으며 (스펠링은 신기하게 다 맞았다) 쉬는 시간에 와서 시비를 걸기도 했다.


나는 당시 영어만 잘했을 뿐이지 다른 과목 성적은 처참했다. '양'이랑 '가'와 친구 맺은 나는 담임선생으로부터도 무시당했다. 언제는 영어 잘하는 학생이 자기 반에 왔다고 좋아하더니, 금세 나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어느 날 중간고사 중 수학 과목을 치르는데, 담임선생이 본인 과목이어서 그런지 감독으로 들어왔다. 


"응 신애야 잘할 수 있지? 지아도 잘해. 그래, 잘 봐." 


반 1, 2등에게 그렇게 격려를 하고 그 바로 뒤에 있던 나는 한번 쓱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 날 봤던 수학 시험 성적은 기억 안 나지만 그때 나를 바라보던 선생의 표정은 잊지 못한다. 그 무시와 멸시 덕분이었을까. 이해보다 암기 위주인 공부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하며 내 성적은 천천히 개선되었다. 


공부가 어찌 되었건 나는 미국과 그 문화가 너무 그리웠다. 방에서 AFKN 미군방송 라디오 들으면서 팝송에 대한 갈증을 채웠고, 용돈을 모으고 모아 좋아하던 가수 음악 시디를 사서 가보처럼 방에 모시고 지냈다. 미국에 있던 친구들과 편지, 이메일, 혹은 채팅으로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인터넷이 미국에 아직 널리 보급이 되지 않아 오래가진 못했다. 그나마 미국에서 가져왔던 소설책들을 읽고 또 읽으며 내 마음을 달랬던 것 같다. 


할머니 집에 살면서 웃지 못할 사연도 많이 생겼다. 막내 고모와 내 어린 사촌이 할머니 집으로 거의 매일 놀러 왔는데, 사촌이 하루는 머리 이를 우리 자매에게 옮긴 적이 있었다. 머리도 찝찝한데 온 집안에 있던 물건과 옷을 소독하는데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주택가에 살았던 우리 바로 옆집에 무당이 살았는데, 그 무당이 인기가 많았는지 그 집 옥상에서 나는 꽹과리 소리 때문에 골치 아픈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또 어느 날 화장실 창문을 통해 도둑이 들어와 집안을 뒤집어 놓은 적도 있었다. 화장실 세탁기 뚜껑에 찍힌 족적, 널브러진 옷장 속 물건들을 보고 겁을 먹었으나 불행 중 다행인 건 우리 가족에겐 값진 물건이 많지 않아 큰 피해를 입진 않았다. 


할머니가 당시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학원이 집과 연결되어있었고 집에는 없던 에어컨이 학원 안에는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열대야를 피하기 위에 학원 바닥에 이불을 펼치고 그랜드 피아노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학원에 비치되어있던 만화책 덕분에 내 한국말도 많이 늘었다. 


그러던 도중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서울 도봉구로 이사를 가는데, 학교 아이들의 괴롭힘이나 질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동시에 내 앞날에 대한 희망도 조금씩 생기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외신기자에서 삼성전자, 아마존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