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감각
2021년 10월 17일 일요일
간밤에 비가 오고 나서 겨울 날씨가 되어버렸다. 더울 때보다 추울 때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나는 옷을 더 챙겨 입었다. 따뜻한 꽃무늬 원피스에 따뜻한 검정 스타킹, 오방색 패딩을 차려입었다. 본격 겨울옷은 본가에 있다. 아직 겨울옷을 챙겨 오지 못했다. 아직 겨울이불과 겨울 베개커버도 챙겨 오지 못했다. 난방을 잠시 켜니 집이 따뜻해지긴 했는데, 벌써부터 난방비가 걱정된다. 최대한 옷을 껴입으면 잠자리에 들만하다.
명학의 사진이 걸려 있는 사진전을 보러 명학과 함께 일민미술관에 갔다. 원래 동행하기로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갑자기 아파서 못 나오게 돼서 둘이 갔다. 예약을 안 하고 갔는데 일요일은 예약이 다 차있다고 했다. 전시를 못 보고 나왔다.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빈 시간이 별로 없어서 전시회 기간 내에 보러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명학의 사진 앞에 서 있는 명학을 사진으로 찍고 왠지 놀리고 싶은데.
명학과 경복궁 큔에 갔다. 창전동 산울림극장 건물에 있었던 수카라 생각이 많이 났다. 창전동에 살 때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수카라가 있었다. 집에서 요리해 먹기가 힘들어서 수카라에 자주 갔다. 수카라에서 100만 원 넘게 썼을 거다. 동네 밥집이라고 생각하고 맨날 가서 커리 등 자연의 먹거리를 먹었다.
혼자 밥 먹으러 가기도 했지만, 온갖 미팅도 수카라에서 다 했다. 일적인 미팅이 아니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일도 수카라에서 이루어졌다. 부모님이 창전동 지하 원룸에 왔을 때도 수카라에 모시고 갔다. 농사를 짓는 엄마, 아빠는 수카라의 분위기와 음식을 좋아했다. 엄마, 아빠한테 내가 좋은 먹거리와 문화를 섭취하고 산다는 점도 어필하면서 안심시켜줬다.
요즘 들어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싶다. 예전에는 원망했다. 원망의 시기가 끝나고 나서는 음악활동의 다양한 어려움이나 생활이 쉽지 않은 것에 대해 하소연했다. 그런데 이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왜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모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건지 알 것 같다.
마른 잎을 보면 기분이 좋다. 아름답고 정답다. 서글프기도 하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찰나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전시회에 갔다가 마른 잎을 전시해 놓은 걸 본 적이 두어 번 있다. 자연물 안의 줄기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핏줄이 떠오른다. 인간도 언젠가 죽느라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들도, 고맙고 반갑던 모든 지인들도. 찰나를 산다고 생각하면 허망하기보단 신기한 기분이 든다. 나는 신기한 기분 느끼는 걸 무척 좋아한다. 세상에 감탄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 계속 감탄하면서 살고 싶다.
야 이것 봐 식물 마른 거 너무 예뻐!
뭔데? 나도 볼래.
아, 나 핸드폰 화질이 너무 안 좋아.
내 핸드폰은 화질이 안 좋다. 그래서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찍으라고 명학에게 계속 무언의 암시를 주었다. 명학은 나의 신호를 받아서인지 그냥 사진을 찍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
큔에 들어가자마자 수카라에서 일하던 분들이 있어서 인사했다. 큔은 처음 방문한 거였다. 수카라에서처럼 구운채소와 비건발효버터 커리를 시켰다. 계절채소 플레이트도 시켜서 속을 채웠다.
큔에서 피가 맑아지는 듯한 식사를 하고 나왔다. 사직동 커피한잔이라는 카페에 갔다. 전날부터 추운 날씨에 무리했던 터라 무척 피곤했다. 명학이를 앞에 두고 나는 또 잠에 들었다.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편의점 앞에서 5분간 잠든 것.
체력이 떨어지면 잠시 눈을 붙인다. 함께 있는 시간에 눈을 붙이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 나도 친구들에게 편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명학과 헤어지고 나서 희섬정으로 갔다. 둥지 프로젝트의 The Galentines 3화 촬영을 하러 갔다. 둥지 프로젝트는 티어파크의 세희, 향니의 지향, 미술작가 모모, 그리고 내가 함께 하는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올해부터 자주 만나 서로에게 둥지가 되어주고 있다.
The Galentines라는 말은 사진작가이자 영상제작, 음악가 활동도 하는 Abi가 사용한 것이었다. Abi 덕분에 우리가 함께 모였지만, Abi는 The Galentines 2화까지 함께 하다가 다른 일로도 너무 바빠서 중간에 하차했다. 하지만 우리와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끼리 한 주제를 잡고 모여서 어떠한 활동을 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1화는 <블랙 위도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2화는 <Poor, Fat, Orphan>이라고 모모 언니가 한국에서 들은 혐오 표현을 천에다가 그리고 꾸미는 작업을 한 후, 또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3화, 희섬정의 송나 님께서 이끄시는 다도체험의 날이었다. '차총'의 '총'은 '총애한다'라고 할 때 사용하는 '총'이라고 했다. 모모 언니는 본인 표정과 닮았다며 선물 받은 바나나 '죠지'를, 세희 언니는 기치 님에게 선물 받았다는 토끼 두 마리 '충이'를 가져왔다. 나와 지향은 희섬정에서 차총할만 한 물건을 받았다. 지향은 지향 같은 차총에 '사각대'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는 차총에 '생사'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내 차총의 얼굴형이 도톰해서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총의 얼굴이 손을 한쪽 턱에 받치고 눈을 감은 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생각하는 사람'을 줄여서 '생사'라고 하고, 나는 생사와 함께 했다.
송나 님께서 이끄는 다도체험을 오감을 사용하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다도를 하며 물이 이리저리 오가는 소리를 들었다. 마른 녹차 잎을 씹어 먹어보기도 했는데, 녹차의 풍미가 느껴졌다. 찻주전자에 풀어진 녹차 잎을 보았다. 자그마한 어항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어떤 잎은 수면에 떠있고, 어떤 잎은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잎은 물 중간에 세로로 떠있었는데, 해마 같았다. 차의 맛과 향을 음미했다. 나중에는 핀셋으로 녹차 잎 몇 개를 꺼내어 손등에 올려 펴보기도 했다. 녹차로 타투를 받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무겁고 힘든 생각이 가득할 때가 있다. 그 생각들을 덜어내거나 거기에 집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내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그 생각들조차도 받아들이고 소화해내어 흘려보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머릿속 생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생 후에는 죽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무엇으로 태어날까? 긴 시간과 큰 공간 속 나 자신을 생각하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나의 무겁고 힘든 생각이 찰나이며, 이 순간도 찰나가 된다. 그럼 찰나의 모든 것이 소중해진다. 오늘, 현재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