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나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긴 산책을 할 수 있는 건 남가주에 살면 좋은 이유 중 하나이다. 한국의 동해 바다와 같은 그런 해변이 차로 10분 정도 가면 눈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동해의 일출은 장관이지만 날씨가 받쳐줘야 볼 수 있는 그런 까탈스러운 아가씨와 같다면, 태평양 너머 지는 해는 수더분한 미국 아줌마처럼 거의 아무 때나 들리기만 하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바닷가에 정기적으로 산책을 나오기 시작한 것이 몇 년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창 클 무렵엔 학교 라이드에, 방과 후 활동 서포트에, 아이들 점심 도시락도 싸야 하고,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주말엔 아이들 스포츠 게임에 참석하느라 시간도 없었고,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산보를 하긴 해도 바닷가까지 갈 생각은 못하고,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였다.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교 진학한 이후에도 미국 고등학생을 둔 부모는 더 바빠진다. 미국 고등학생은 학교에서 모두 방과 후 활동을 하는데, 스포츠, 댄스, 코러스, 연극, 밴드 활동이 한 학기 내내 이어진다. 그냥 방과 후에 모여서 연습만 하는 게 아니라, 지역 대회, 주 대회, 심지어는 전국 대회까지 나가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비하고 예산도 많이 든다. 만일 캘리포니아 고등학교가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참석한다고 치면 항공료와 체류비만 해도 일인당 천 달러가 넘는다.
그래도 학생들이 돈 들여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대학 입학 원서 작성 시 레저메에 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회는 팀 전체가 참가하는 행사여서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 넘는 인원이 움직이기 때문에 계획을 잘 짜야 효과적인 여행이 된다. 따라서 자녀에게 관심을 갖는 미국 고등학생 부모는 부스터(학부모 후원 모임)가 주도하는 행사에 다른 부모들이랑 함께 참여해 펀드레이징(기금 모금)을 해서 공동 및 개인 기금을 조성해 팀과 자녀를 서포트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행히 나는 매일 출근하는 직업을 가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후, 아이들을 위해 쓰던 시간을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 바닷가에서 긴 산책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녀들의 포스트하이스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모들도 꽤 있다. 그런 부류는 자녀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버린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지면서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엠티 네스트(빈 둥지) 신드롬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 고등학생을 둔 부모는 할 일도 많고, 다른 학부모들이랑 만날 기회도 많아서 재밌게 잘 지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육아에서 해방된 후, 많아진 시간을 날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 더 행복해졌다. (그렇다고 이전엔 불행했다는 의미는 아님) 먼저 아이들 스케쥴이 아닌, 내 스케쥴에 따라 하루를 계획하는 것이 좋았다. 난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고, 예측 가능한 생활을 선호한다. 그건 아마도 루틴을 따르는 나의 생활 방식과 매사 준비하는 나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걸 정리하고, 월급쟁이가 되면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아이들 픽업 걱정 없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편하고, 직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과 사귀게 되고 클라이언트랑 만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 점도 좋다. 혼자 작업할 때보다 시간적 여유는 줄어들었지만, 고정 수입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줬다. 또한 401K(두 번째 연금. 소셜 시큐리티가 국민연금)까지 생겨 노후를 더 착실하게 준비하게 된 점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그뿐만 아니라,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일주일에 40시간을 일하면서도 책 읽을 시간이 생기는 건 순전히 오디오북 덕분이다. 눈으로 읽을 필요 없이, 귀로 듣는 책이어서 운전하면서, 운동하면서, 요리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젠 아이들 스포츠 게임 응원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동을 즐기러 아이스링크도 가고 골프장에도 간다.
처음부터 내 인생이 아이들 없이 내 스케쥴대로 움직였다면 아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의 소중함을 지금처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난 이번 주에도 바닷가에 가서 긴 산책을 하며 지는 해와 노을을 바라봤다. 캘리포니아에도 가을이 다가왔음을 해가 떨어지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계절의 바뀜을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 성급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워낙 준비 의식이 철저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난 그런 섣부른 걱정보다 그냥 아름다운 노을을 보면서 사색의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