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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ys Nov 08. 2021

나를 위해 쓰는 시간

바닷가에 나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긴 산책을 할 수 있는 건 남가주에 살면 좋은 이유 중 하나이다. 한국의 동해 바다와 같은 그런 해변이 차로 10분 정도 가면 눈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동해의 일출은 장관이지만 날씨가 받쳐줘야 볼 수 있는 그런 까탈스러운 아가씨와 같다면, 태평양 너머 지는 해는 수더분한 미국 아줌마처럼 거의 아무 때나 들리기만 하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바닷가에 정기적으로 산책을 나오기 시작한 것이 몇 년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한창 클 무렵엔 학교 라이드에, 방과 후 활동 서포트에, 아이들 점심 도시락도 싸야 하고,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주말엔 아이들 스포츠 게임에 참석하느라 시간도 없었고,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산보를 하긴 해도 바닷가까지 갈 생각은 못하고,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였다.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교 진학한 이후에도 미국 고등학생을  부모는  바빠진다. 미국 고등학생은 학교에서 모두 방과  활동을 하는데, 스포츠, 댄스, 코러스, 연극, 밴드 활동이  학기 내내 이어진다. 그냥 방과 후에 모여서 연습만 하는  아니라, 지역 대회,  대회, 심지어는 전국 대회까지 나가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비하고 예산도 많이 든다. 만일 캘리포니아 고등학교가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참석한다고 치면 항공료와 체류비만 해도 일인당  달러가 넘는다.


그래도 학생들이 돈 들여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대학 입학 원서 작성 시 레저메에 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회는 팀 전체가 참가하는 행사여서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 넘는 인원이 움직이기 때문에 계획을 잘 짜야 효과적인 여행이 된다. 따라서 자녀에게 관심을 갖는 미국 고등학생 부모는 부스터(학부모 후원 모임)가 주도하는 행사에 다른 부모들이랑 함께 참여해 펀드레이징(기금 모금)을 해서 공동 및 개인 기금을 조성해 팀과 자녀를 서포트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행히 나는 매일 출근하는 직업을 가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후, 아이들을 위해 쓰던 시간을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 바닷가에서 긴 산책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녀들의 포스트하이스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모들도 꽤 있다. 그런 부류는 자녀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버린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지면서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엠티 네스트(빈 둥지) 신드롬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 고등학생을 둔 부모는 할 일도 많고, 다른 학부모들이랑 만날 기회도 많아서 재밌게 잘 지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육아에서 해방된 후, 많아진 시간을 날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 더 행복해졌다. (그렇다고 이전엔 불행했다는 의미는 아님) 먼저 아이들 스케쥴이 아닌, 내 스케쥴에 따라 하루를 계획하는 것이 좋았다. 난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고, 예측 가능한 생활을 선호한다. 그건 아마도 루틴을 따르는 나의 생활 방식과 매사 준비하는 나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걸 정리하고, 월급쟁이가 되면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아이들 픽업 걱정 없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편하고, 직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과 사귀게 되고 클라이언트랑 만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 점도 좋다. 혼자 작업할 때보다 시간적 여유는 줄어들었지만, 고정 수입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줬다. 또한 401K(두 번째 연금. 소셜 시큐리티가 국민연금)까지 생겨 노후를 더 착실하게 준비하게 된 점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그뿐만 아니라,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일주일에 40시간을 일하면서도 책 읽을 시간이 생기는 건 순전히 오디오북 덕분이다. 눈으로 읽을 필요 없이, 귀로 듣는 책이어서 운전하면서, 운동하면서, 요리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젠 아이들 스포츠 게임 응원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동을 즐기러 아이스링크도 가고 골프장에도 간다.


처음부터 내 인생이 아이들 없이 내 스케쥴대로 움직였다면 아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의 소중함을 지금처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난 이번 주에도 바닷가에 가서 긴 산책을 하며 지는 해와 노을을 바라봤다. 캘리포니아에도 가을이 다가왔음을 해가 떨어지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계절의 바뀜을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 성급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워낙 준비 의식이 철저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난 그런 섣부른 걱정보다 그냥 아름다운 노을을 보면서 사색의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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