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하는 전업주부(맞벌이) #5
-언제 하려고?
-네, 6월 1일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와이프 복직날에요.
-조금 늦추면 안 되냐?
인사고과가 10월에 마무리되니깐 11월에..
-...
진수는 머뭇거렸다.
인사고과.. 이제껏 인사고과에 목숨을 걸었을까?
진수는 이제껏 인사고과를 잘 받지도 않았지만,
평균 정도 받고 있었다.
-부장 진급하려면 앞으로가 중요해
올해 고과 괜찮을 텐데. 지금 가버리면 못주잖아.
진수는 앞에 있는 음료수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뭐가 중요하지? 나한테 뭐가 고과가 중요한가?
진수는 고과에 신경 쓰는 성향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넌 고과가 좋으니깐. 그렇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고과였지만 고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 꼭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
진짜 고과에 신경 쓰니 않았나?
진수는 달달한 녹차라테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진수는 예스맨이었다. 고과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예스맨이 될 수 있을까?
부장님이 옆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진수는 마음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진수는 예스맨이었지만,
고과는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기준에서 판단되고 결정되는 게 고과이기에,
그저 자신은 수긍하는 것이라고,,
고과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성실하고 트러블을 싫어하는 진수의 성향 탓에
고과면담까지도 '예스'였다.
-와이프랑 이야기 좀 해봐..
11월까지만 시터를 좀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네! 와이프랑 상의해 보고 내일 알려드릴게요.
'부장님과 면담했어'
'뭐래?'
진수는 카톡으로 민진과 이야기하려 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민진이 번호를 누른다.
-부장님이 뭐래?
-11월에 가래. 고과 때문에.
-체리가 중요하지 고과는 중요하지 않다며.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바로 자르기엔 뭐 하잖아.
-너 아주머니에게 맡길 수 있어?
지금 5월인데 한 달 만에 구할 수 있어?
-아... 몰라!! 퇴근해서 이야기하자.
진수는 화가 났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거절하면 트러블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에
절대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사무실로 가서, 모니터를 보니,
여전히 메신저가 깜빡거린다.
-그만 좀 메신저 보내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진수는 메신저 창에 '안녕하세요~'라고
타이핑한다.
-민진아. 나 왔어.
-귀요미 잘 있었어??
체리가 문 앞까지 나온다.
천사다 천사..
밥냄새, 요리냄새가 나는
이 시간이 좋다.
맞벌이지만 민진이가 전업주부로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11월에 육아휴직할 거야?
-모르겠어..
-안돼,, 체리 문제도 있지만 네 문제도 심각해
-너 회사 때문에 그렇게 죽을 것 같다고
지금도 정신과약 먹잖아.
진수는 아무 말없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다.
민진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우울증 약을 복용한 지 6개월이 지나가고
육아휴직으로 회사와 멀어지고 싶다고
이야기한 기억이 떠오른다.
-하아~
세면대 유리창에
물방울이 묻는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민진이와 체리가 밥을 먹고 있다.
뚝배기에서 김치찌개가
힘없이 보글거린다.
-그냥 6월에 간다고 할게.
아이 때문이라는데...
자기가 무슨 권한이라고..
-그래, 난 너를 위해서도 휴직 써야 돼.
김치찌개가 뜨겁다.
체리는 밥의 절반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손으로 조몰락조몰락거리면서..
진수는 김치찌개 국물을 밥에 끼얹으며
'그냥 이렇게 말할걸..'
먹는 둥 마는 둥
부장님과의 면담을 떠올린다.
-와이프와 상담해 봤어?
-네? 네...
-잠깐 이야기할까?
-네..
진수는 부장님을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동료들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아~ 소문나겠네...'
-그래, 와이프랑 그렇게 결정했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팀장님한테 먼저 이야기할게.
어제 먹었던 김치찌개가 아래로 쑥 내려간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였나?
왜 혼자 싸매고 고민했지?
그래.. 아이문제인데,, 내가 갑이지..
-부장님 하고 면담했어?
-네..
옆에 선배가 역시나 물어본다.
-잘했어. 와 네가 첫 번째 남자 육아휴직이네..
-그렇게 됐어요..
앞으로 한 달..
진수는 한 달 뒤면 1년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치 휴가 가기 3일 전
같은 느낌이다.
체리 생각은 나지 않고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우울증이 다 낫은 거 같다.
진수는 일도 되지 않고 일을 벌여서도 안된다.
아직 공식적인 부장님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이제 소문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그렇게 진수는 옆 동료와 커피타임을 갖는다.
한 달도 남지 않는 시간,
그리고 1년 육아휴직
진수는 입사한 지 11년 만에
오늘 퇴근길은 다른 날과 달랐다.
5월의 날씨만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