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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리치 Sep 27. 2023

5시면 걸려오는 전화, “언제 와?”

면도하는 전업주부 (육아휴직) #17

"넵, 부장님. 그럼 이렇게 수신처로 메일 보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민진은 오래 걸릴 듯한 업무가 마무리되어서 기쁘다.


"민진 님!!"

"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오래간만에 회식하는데, 많이 빠졌잖아. 밥 먹고 가"

"아,, 네..."


민진은 번뜩 진수가 생각났다. 


'지이이잉~ 지이잉'

"부장님, 잠시만요.."


진수의 전화였다. 슬쩍 시계를 보니 5시다. 


"어,, 진수야"

"언제 와?"


전화기 너머로, 체리가 노는 소리가 툭툭 끊기면서 들린다.


"진수야... 오늘 나,, 회식 참석했다가 밥만 먹고 8시까지 가도 돼?"

"힝,, 회식? 어쩔 수 없지.. 그냥 9시까지와"

"그래? 고마워 울서방~"


전화를 끊고, 민진은 최부장님과 눈이 마주친다.

"넵,, 부장님.. 오늘 갈게요"


최부장님이 엄지를 척 치켜든다. 


민진은 회를 한 점 젓가락으로 든다. 이게 얼마만인지,, 복직하고 처음이다.


"박 과장님, 오늘 허락받으셨나 보네요?"

"그래도 9시까지 가야 돼."

"소주 한 잔만 드세요."

"그,, 그래.."


소주 한 잔, 회 한 점... 민진은 해방감을 느꼈다. 어수선한 횟집 안에서 민진의 한 잔은 한 병이 되었고 민진도 어수선해진다. 


"그러니깐,, 마케팅 박 부장님은 아무것도 몰라, 공감 하나도 없고, T인가 봐. 하하하"


민진은 앞에 있는 소주잔을 든다. 후배들도 한 두 명 잔을 들어 민진의 잔에 부딪힌다. 9월, 아직도 낮에는 덥지만 해가 짧아지니 가을이다. 8시, 이미 밖에는 밤이 되었다. 오래간만에 회식이라 민진도 흥분했다. 분위기는 2차로 이어질 것 같다. '10시까지 간다고 할까?' 민진은 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선배님, 2차 가시죠!"

"아,, 난 가봐야 돼.. 9시까지 가기로 했어"

"에이, 회식 몇 번 참석했다고, 오늘 봐달라고 전화하세요"


'네가 몰라서 그래..' 민진은 손사래를 치면서 밖으로 나온다. 밖에는 후배들과 담배를 피우고 있던 최부장님이 민진을 쳐다본다.


"지금 갈라고?"

"네, 9시까지 들어가기로 했어요"

"체리는 잘 크고 있나?"

"네,, 부장님.. 저, 그럼 가볼게요."

"그래"


8시 30분, 8시부터 나오려고 했으나 결국 이 시간, 민진은 다급해졌다. 택시가 보이지 않아서 카카오티를 열어서 블루택시를 잡는다.


"술 왜 이렇게 많이 먹었어?"

"아니야... 3잔 먹었어. 안 취했어"


무표정한 진수는 민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으,, 술냄새.. 술 많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많이 안 먹었대도!"

"혀가 꼬였어. 했던 말 계속하고"

"아, 진짜.. 내가 언제.. 안 먹었다니깐 믿어주라.."

"진짜 짜증 난다."


술김인지 홧김인지 민진은 억울했다. 민진은 취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굳이 하지 않았어야 할, 그냥 이대로 끝날 수 있었지만, 생각들이 민진의 입으로 나왔다.


"내가 회식 얼마나 했다고, 그리고 9시까지 왔잖아. 술도 많이 안 먹었는데, 맨날 화만 내고.."

"술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 난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눈 봐,, 잠 오지? 잘 거지?"

"너랑 많이 이야기하잖아.. 어제도 그저께도, 얼마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나도 피곤하다고!!"

"난 누구랑 이야기하냐고? 난 대화할 사람이 없다고!!!"


'또 대화 타령' 민진은 생각했다. 진수는 늘 그랬다. 민진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어린이집을 가지 않는 체리를 혼자서 키우는 진수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 늘 회사 마치고 온 민진에게 대화를 일방적으로 퍼부었다. 잔소리와 함께.


"체리 키우는 게 힘들면, 시터 구해보자."

"내가 시터 구하자고 했어? 내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어떡해!! 난 오빠 마음을 몰라..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를 해! 그래야지 뭔가 하지!"

"그래서 대화하잖아!!"

"맨날 대화하다가 화만 내잖아. 자책하고.. 나보고 어쩌라고!!"

"아.. 씨,,"


팬티바람에 군데군데 간장, 고춧가루 묻어있고, 늘어진 흰 티를 입은 진수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반바지를 입고 나온 진수가 민진이 시선을 외면하고 지나친다.


"쾅!"


문이 닫힌다. 민진은 주저 앉는다. 눈물이 나온다. 진수가 나갔다. 늘 이런 식이었다. 혼자 나가버리고, 우는 체리. 민진은 울고 있는 체리를 꼭 안는다.


"체리야,, 흑, 너 탓이 아니야. 엄마하고 아빠가 싸워서 그래, 너 때문에.. 흑, 그런 거 아니야"


민진은 체리를 안고 운다. 술기운이 올라온다.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가 계셨으면 체리 엄청 좋아하셔서 한 달음에 달려오셨을 것 같다. 3살 체리,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 아빠의 얼굴, 아빠의 손, 아빠의 목소리, 생생한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크게 울고 싶지만, 체리가 걱정할까 봐 민진은 흐느낀다. 체리의 내복에 그려진 토끼무늬로 눈물이 떨어지더니, 회색빛으로 번져나간다.


"오빠, 어디야?"

"......"

"미안해.. 들어와"

"나도 미안해"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진수가 들어온다. 진수는 털썩 소파에 앉는다. 민진은 고무장갑을 벗고 진수 옆으로 앉았다. 민진은 진수를 보고 있지만 진수는 거실바닥만 쳐다보고 있다가 슬쩍 민진을 본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민진은 20개의 치아를 들어내고 억지웃음을 짓는다. 


"오빠, 미안해.."


민진이 진수를 품으로 안자마자, 진수도 팔을 벌려 꼭 안는다.


"나도 미안해"


진수는 시계를 본다. 10시.


"작은 불 켜고, 체리 재울게. 재우고 나서 내가 설거지할게"

"아니야, 내가 재울게"


진수가 불을 끄고 작은 수면등을 킨다. 민진은 체리를 앉고 일어난다.


'쉬쉬쉬~'

알딸딸한 술기운이 있지만 민진은 체리를 재운다. 


'체리야, 빨리 자자, 아빠랑 이야기해야 돼. 너무 피곤한데 더 늦어지면 안 돼"


민진은 암막커튼을 친 희미한 거실을 그렇게 빙빙 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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