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로리 Mar 13. 2024

수줍은 인사

3월의 감정

새 학기가 시작되고 거리는 다시 활기찼다.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저마다 키가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 끼리끼리 걸어간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등원을 하고, 유모차를 끈 엄마들도 눈에 자주 보인다. 겨우내 어두웠던 하늘도 해가 일찍 눈을 떠 봄을 알리고 아이들의 목소리와 카랑카랑한 날씨가 나무와 풀을 깨운다. 꽃망울들이 눈을 비비며 꽃을 피울 거고 그러면 정말 봄이다.


하지만 몸에 닿는 온도는 아직 얄궂어서 나는 아침마다 초록색 검색창에 ‘오늘 날씨’를 쳐봐야 했다. 수치상으로 보이는 날씨보다는 역시 몸으로 느끼는 것이 와닿겠지만 불안한 마음은 숫자로 보여지는 것이 낫다. 현재 기온을 보면 하루의 디폴트값이 정해진다. 오늘은 어제보다 2.1도 낮고 일교차가 크다고 적혀있다. 아침은 쌀쌀하지만 낮에는 포근한 날씨가 될 거라고. 나는 일기예보를 보며 두 손을 모아 빈다. 빨리 따뜻해지라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봄이 되어도 겨울 동안 입었던 기모 티셔츠를 섣불리 벗질 못한다. 내게는 아직 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인데 좀 더 햇볕이 뜨거워져서 머리통이 적당하게 익어야 기모 티셔츠와 작별을 할 수 있다. 아침엔 롱패딩까지 무장하고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봄이 왔는지 옷차림이 가벼워 보인다. 부끄럽다. 한밤중에 잠옷바지를 입고 집 근처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부끄럽다. 오. 제발. 아무도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런데 쑥스러움에 몸을 배배 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학기 초 새로운 반을 배정받고 새로운 아이들이 뒤섞여 있는 교실에서 적응하기란 영 쉽지 않은 일이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란 얼마나 더 쑥스러웠던가. 아직 서먹한 사이로 같이 밥을 먹기란 또 어떻고.


“엄마. 나 쟤 알아. 나랑 같은 반인데...”

“그래? 그런데 왜 아는 체를 안 해?”

“얼굴만 알고 이름을 몰라. 쑥스러워서 아직 말을 안 해봤어.”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것들은 수줍다.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자기소개도 수줍고,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하는 것도 수줍고, 내 몸에 편한 옷 말고 예쁘고 타이트한 옷을 입을 때에도 남이 나를 평가할까 봐 쑥스럽다. 마음도 지레 겁을 먹고 갈팡질팡 간질거린다. 봄이 왔지만 우리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이다. 3월의 봄은 그렇다. 늘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나와 너의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 나의 온도와 너의 온도에서 적정점을 찾는 시간.


어제는 봄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종일 내리는 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가 내렸다. 그리고 어제보다 더 따뜻해짐이 틀림없다. 거리를 걷다 보니 나뭇가지에 꽃망울들이 터진 것이 보였다. 그렇다. 이제야 수줍게 봄이 오는 것이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봄비는 수줍은 새 학기 인사처럼 조심스럽고 얌전하다.


어제는 비가 내려서 어떤 작가님 생각이 났다. 작가님은 비냄새를 좋아한다고 했다. 비가 내릴 때 창문을 열고 인센스 스틱을 태우는 냄새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그 작가님만 보면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저도 좋아해요.'라는 말 조차 하지 못했다. 어제는 작가님이 좋아하는 비냄새가 났다. 아마도 단정한 흰색 셔츠를 입고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든 채 그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수줍은 비가 조금은 익숙해져서 촉촉한 단비를 내려줄 때까지. 피어나는 꽃들에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따뜻한 공기와 초록잎사귀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계속 수줍다.


언젠간 눈 마주치며 서로에게 포근한 사이가 되길 나도, 다른 이에게도 바라본다.   

수요일 연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