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로리 May 18. 2023

추억은 빛을 바래도 촌스럽지 않다.

5월의 감정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가 문을 닫아 아쉬웠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 왠지 모를 편안함에 늘 기분이 좋아졌던 곳이었다. 그곳을 좋아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어떤 분위기에 반해서 내가 곳을 찾았던가. 벽면을 가득 채운 80년대 풍의 봉황 자개장롱문이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튼튼한 옷장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기억, 엄마의 파란색 땡땡이 원피스를 몰래 훔쳐 입었던 기억 등 그곳에 가면 자연스레 좋았던 추억이 소환되었다. 또 반대편에 있던 빨간색 Britz 라디오에 반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오래된 라디오를 보면 내 어릴 적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좋아하는 라디오를 들으려고 미세한 손놀림으로 주파수를 맞추던 자그만 손, 좀 더 깨끗한 음질이 들리도록 은색 안테나를 최대한 길게 내빼던 모습까지.





그 카페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떤 가게가 생겼나 궁금해서 근처를 지나가다가 오랜만에 발길을 돌려봤다. 내가 알고 있던 진한 고딕체의 촌스러운 이름은 없어지고 세련된 영어간판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그 자리는 카페가 어울리는 자리가 맞았다. 새로운 카페에 호기심이 생겨 살포시 문손잡이를 당겨봤다. 어서 오세요! 나긋한 인사가 귀를 타고 들어왔다.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나는 발앞꿈치에 힘을 주고 고양이마냥 소리 내지 않고 걸어보려 애쓴다.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움직이는 것도 천천히. 나의 움직임 중에서 바쁜 것은 오직 눈뿐이다.




새로워진 카페는 익숙한 듯 신선했다. 인테리어는 기존 카페모습의 절반을 그대로 살려두고, 조금만 바꾼듯했다. 솔향기가 물씬 풍길 것 같은 짙은 녹색의 메인컬러에 이제는 쨍한 주황색이 더해져 좀 더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가 풍긴다. 그곳에 있던 시그니처 메뉴였던 오란다와 다방커피들도 그대로인 것이 친숙함마저 느껴져서 메뉴판을 보고 웃었다. 가게 상호만 바꾸고 다시 오픈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익숙한 것들에 나는 비범하게 사장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처음 보는 나를 보며 되려 웃어 보일 뿐이었다.


카페 한편에 추억의 게임기가 보인다. 이건 이전에 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련된 카페에서도 묘하게 추억의 게임기가 어울리는 것 보니 역시나 이곳의 공기는 사람들의 따뜻한 추억이 어려있나 보다. 문방구 앞에 아이들과 쪼그려 앉아하던 것처럼 나도 ‘추억의 짱껨뽀’라고 쓰여 있는 가위바위보 게임기에 호기롭게 앉아봤다. 어떻게 하던 거더라? 잘 생각나진 않지만, 마침 가방 안에 있던 동전이 거슬리던 차였다. 백 원짜리 동전 한 개를 꺼내 게임기에 넣어봤다. 가위, 바위, 보! 아무도 없는 카페에 쩌렁쩌렁하게 익살스러운 전자음이 퍼진다. 그 소리에 당황해 나도 주황버튼 세 개중 눈에 보이는 하나를 눌러본다. 졌다. 하지만 동전은 아직 가방에 몇 개가 더 있다. 다시 한번 동전을 넣고 가위, 바위, 보! 이겼다. 아이처럼 기뻤다. 분명 가방에서 소리 내는 동전을 처분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콰르르 떨어지는 동전들을 받아냈다.


과거의 향기는 라일락 꽃밭보다 향기가 진하다.
 - 프란츠 투생



과거의 이곳에서처럼 나는 이제 책을 펴본다. 게임도 이겼으니 자리에 놓인 커피가 더 맛있을 수밖에 없다. 카페에 남자 손님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이 카페가 익숙한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놓고 자연스레 게임기 쪽으로 향했다. 뒤집혀있는 플라스틱 우유바구니에 두 어른의 엉덩이가 자리를 잡더니 조이스틱을 마구 흔들고, 버튼을 빠르게 누른다. 그들이 하는 게임은 철권게임이다. 움찔거리는 남자 어른의 숨겨진 동심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어 나는 읽던 책을 뒤집어두고 그들을 지켜본다. 한 순간 괴성이 울리고, 한 명은 웃고 다른 한 명은 못내 분한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단번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 나갔다. 이 카페에 온 목적이 커피인지, 게임인지, 쉼인지 모를 정도로. 어찌 됐건 그들도 나도 빛바랜 추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을 것임엔 분명하다.


남자손님들이 나간 문 사이로 라일락 향기가 들어왔다. 바깥에는 봄의 향기들이 코를 발름거리게 만든다. 예전에는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촌스러운 빛깔이 뭐가 예쁘다고 하는지, 꽃잔디와 철쭉에 왜 발걸음을 멈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나의 추억과 닿아보니 언제라도 그것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세련되었다. 오늘의 생생한 정서와 분위기도 언젠가는 빛에 바라고 누군가에게는 촌스럽게 내비쳐질 테지만.   


카페 오디오 선반에 있는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눈에 띈다. 이름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90년대 메가 히트송 스페셜 청춘가요’다. 메가, 히트. 청춘. 단어부터가 그 시대를 알 수 있게 만든다. 1A, 1B면에 수록된 노래들과 가수들을 천천히 떠올려본다. 내게는 여전히 세련되게 느껴지는 터보의 어느 째즈바, R.ef의 이별공식을 오래된 그 빨간색 오디오에 넣어 재생시켜보고 싶다.




추억은 빛을 바래도 촌스럽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깊이 배어든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