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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Jul 13. 2023

관찰 일지

7월의 감정

공기정화나 인테리어를 위해 식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식물을 가꾸고 기르며 교감하는 것에 ‘반려식물’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식물 앞에 ‘반려’라는 단어 하나 붙은 것인데 입으로 내뱉을수록 예쁜 말이다. 내게 동반자 같은 짝이 생긴다는 것. 언제 들어도 든든하고 좋은 단어, 반려.


우리 집에도 반려식물이 살고 있다. 지금까지 죽인 식물만 해도 한 트럭은 되는 터라 더 이상 우리 집에 식물은 없을 거다 생각했을 즈음이었다. 이름은 최낭콩. 최낭콩은 큰 아이의 학교 과학시간에 관찰일기 작성을 위한 과제도구였다. 아이는 적갈색의 강낭콩 두 알을 흙이 담긴 하얀색 작은 화분에 손으로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 파묻어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이는 최낭콩의 변화를 살피고 기록했다. 예전에는 이런 숙제가 있으면 아이를 대신해 내가 식물을 보살펴주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아이를 살펴보기로 했다. 아이의 의욕에 비례하는 책임감이 궁금했던 터였다.


<최낭콩 관찰일지>
day1. 내 강낭콩 이름은 최낭콩
day2. 아무 변화 없음. 제발 자라라.
day5. 5일 만에 싹이 텄다. 야호.
day7. 낭콩이에게 본잎이 생겼다. 약 4cm다.
day8. 떡잎이 본잎한테 영양분을 주고 시들고 있다. 줄기는 약 16cm로 자랐고, 이파리는 약 6cm다. 내일은 떡잎이 전부 시들 것 같다.
day9. 지지대를 설치해 줬다.
day10. 낭콩이의 본잎이 약 10cm다. 줄기는 약 30cm다. 떡잎은 완벽하게 시들었다.
day13. 낭콩이의 줄기는 약 43cm이고, 이파리 잎이 13개다. 떡잎은 엄청나게 쭈그러들었다.
day17. 여행을 다녀온 사이 낭콩이가 죽었을까 봐 걱정됐는데 줄기가 약 75cm다. 이파리 잎도 28개로 늘었다.
day19. 낭콩이의 줄기가 꺾였다. 지지대로 잘 올라가라고 꼬아주다가 참사가 일어났다. 괜찮을까?
day23. 낭콩이에게 꽃봉오리가 생겼다. 약간 흰색? 분홍색? 귀엽다.
day27. 낭콩이 꽃이 언제 폈다가 졌는지 모르겠지만, 꽃이 지고 연두색 꼬투리가 생겼다. 작아서 귀엽다.
day32. 콩 꼬투리가 점점 길어진다. 안에 네다섯 알 정도 들어가 있는 것처럼 올록볼록하다.

      

큰 아이가 강낭콩을 키운 지 한 달이 지났다. 나도 아이를 관찰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이는 겉흙이 마르면 언제라도 물을 줬다. 처음에는 최낭콩의 존재를 잊는 날도 있었지만 매일 조금씩 자라 있는 낭콩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최낭콩은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잠을 자고 일어나거나, 외출을 한 사이에 갑자기 커져 있었다. 우리 몰래 줄기를 뻗어 영양제라도 훔쳐 먹는지 돌아보면 쑥쑥 자라나 있었다. 아이도 신기해했지만 사실 이건 나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던 반려식물들이 내겐 없었으니 말이다.  


아이는 가끔 혼자서 햇빛을 내리쬐며 최낭콩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줄기가 위로 뻗어갈수록 지지대를 더 높이 연결해 주었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더 어린 무언가를 보살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내 아이도 이런 면이 있구나, 모르는 사이에 많이 컸구나, 하고 나도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작은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 말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알아차리는 것 말고, 그냥 그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봐왔기에 관심으로 알아차리는 것들. 나는 그런 마음을 사랑한다.


변화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최낭콩을 바라보며 아이는 감사를 느꼈을 것이며, 나는 아이를 보며 감사를 느꼈다. 관찰 일지를 쓰며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기대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최낭콩의 연둣빛 꼬투리가 어제보다 더 길어졌다. 손으로 세어보니 꼬투리가 열한 개나 된다. 작은 강낭콩 두 알을 심어 키웠을 뿐인데 꼬투리에서 몇 알의 강낭콩을 수확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손에 담긴 결실은 아마 감동일 것이다.


꼬투리가 벌어질 때까지



‘순간의 정서’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모임을 운영해보았다. 모임을 맡아서 하는 것은 내게도 처음 도전해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품고 찾아들었고, 글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글쓰기 화분 안에서 조금씩 여물고 단단해지면서 관찰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들이 빠르게 자판을 치는 손을, 미묘한 눈가의 떨림을 늘 주의 깊게 관찰했다. 가끔은 작은 화분 안에 몰아닥친 비바람 때문에 가슴이 휘청할 때도 있었고, 글을 읽는 순간 따뜻한 온기와 햇볕으로 편안해지기도 했다. 그들은 그 자체로 감사였고 내게 선물이었다.


이제 글쓰기 모임의 수확을 앞두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수확하고 나면, 또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준비하는 강낭콩처럼 우리는 흩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했던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했는지 알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여름방학을 잘 보내면서 다음 글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면 그들의 자취를 따라가 그 글을 읽으며 관찰자의 마음으로 차곡차곡 기록할 것이다. 더 옹골차진 그들의 글에 미리 감탄을 할 것이다.


기록을 통해 성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록을 통해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들만 기록하며 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모두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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