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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Jun 20.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비와 죽음.

정신 응급에 대한 기억.

 응급실 사람들은 비를 좋아한다. 비가 오면 환자가 줄기 때문이다. 전에도 한 번 다룬 적 있는 이야기인데, 응급실을 바쁘게 만드는 주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응급실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응급실에 오는 것이다. 비는 이런 경증 환자들의 응급실 방문 의지를 줄인다. 경증 환자들은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는 대신 집에서 요양하거나, 보다 가까운 동네 병원으로 방문한다.


 정말 대학병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에게는 지장이 없다. 그런 환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급차를 불러서라도 응급실에 오기 때문에, 비가 온다고 해서 방문이 줄거나 늘지 않는다. 또, 빗길에 미끄러져 다친 외상 환자는 일견 늘 것 같지만, 그것도 사실은 분명하지 않다. 외출하는 사람의 수가 줄기 때문에, 외상 환자의 수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가볍게 다치고 말 사람이 크게 다칠 따름이다.


 하지만 분명히 늘어난다고 느꼈던 환자군이 하나 있다. 바로 정신 응급 환자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하여 문헌을 찾아보니, 실제로 날씨에 따라 정신 질환 발생이 달라진다는 연구가 더러 있었다. 먹구름이 끼어 일조량이 줄면, 호르몬 균형이 망가져서 우울증 등의 정신 질환이 악화된다는 것이다.


 정신 응급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정신 질환에 무슨 응급이 있겠나 싶겠지만, 사실 정신 응급 환자는 응급실에서 만나는 주요 환자군 중 하나이다. 정신 질환은 국내 사망 원인 중 5위이자, 가장 확실하고 치명적인 사망 원인이다. 그렇다. 바로 자살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장마철이었다. 한 달 남짓 심심찮게 비가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야심한 시각, 손목을 다친 사람이 구급대원들과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젊은 여자였다. 나는 응급실 깊숙한 곳에 있는 내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입구에서 손목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듣고 환자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 때면 긴장하게 된다. 경험적으로, 손목 손상 환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자해를 저지른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 환자는 역시나 스스로 자기 손목을 자해한 사람이었다. 과도로 그런 것이라 했다. 왜 그랬냐고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드레싱을 해 주고 기본 검사를 진행한 뒤, 그런 환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당직 의사를 연결시켜 주면 된다. 나중에 정신과 당직의가 적어 둔 상담 기록을 보니, 환자는 그날 낮에 사귀던 남자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홧김에 그런 짓을 했다는 것 같았다.


 자해를 저지르거나 자살을 시도한 환자에게는 보통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 퇴원시켰다가 자칫 자살에 ‘성공’해서 돌아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해를 저지른 직후 하루에서 3일까지가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이라도 관찰하며 심리적 안정을 돕는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환자는 정신 질환의 병력도 없었고, 욱하는 마음에 실수한 것이라고 인정했으며,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에 협조적이었다. 환자의 소식을 듣고 상경한 엄마 또한 당분간 함께 지낼 것이라며 퇴원을 희망했다. 이에 정신과 의사는 약을 처방하고, 가까운 외래로 방문하게끔 하여 환자를 퇴원시켰다.




 거기서 끝이었다면 굳이 이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며칠 뒤 똑같은 부위에 먼젓번보다 더 큰 상처를 내고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그날도 비가 왔다. 공교롭게도 또 내 근무 때였다. 똑같이 과도로 낸 상처였지만, 이번에는 봉합술이 필요할 만큼 크고 깊었다. 내가 봉합술을 마치자, 환자와 환자의 엄마 모두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퇴원하겠다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반드시 정신과로 입원하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고지했다. 정신과 의사의 판단도 같았다.


 그러나 환자는 입원이 가능한 정신병원을 수배하는 사이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가 그 환자의 봉합술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훨씬 중한 환자가 한 명 실려왔는데, 의료진과 직원들이 그 중한 환자를 상대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 도주한 것이었다.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는 데다가 그 흔한 수액줄 하나 달고 있지 않았으니, 입구를 지키는 보안요원들조차 그가 응급실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환자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참고로, 정신 응급 환자에게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수액을 달지 않는다. 그 수액 줄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환자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몇 번의 근무가 이어지면서 그 환자를 진료했던 기억 또한,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는 사이 점차 뇌리에서 잊혀 갔다. 환자가 응급실에서 도주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예 드문 일도 아니다.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 달이 끝날 무렵의 어느 날, 밤 사이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을 리뷰하는 아침 당직 보고 자리에서, 그 환자가 전날 밤에 재차 응급실에 왔었음을 알게 되었다. 수석전공의의 발표 중에 익숙한 이름이 보여 들어보니, 과연 그 사람이었다. 심정지로 내원하여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결국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전날 밤, 환자는 예의 그 전 남자친구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걱정이 된 전 남자친구가 119에 신고했고, 구급대원들이 환자의 집에 도착해 보니 이미 목을 맨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구급대원들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하며 응급실로 왔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난 탓인지, 1시간에 가까운 심폐소생술에도 불구 차도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성공’하고 만 것이었다.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심심찮게 죽음을 경험했다. 노인들이 손으로 다 꼽을 수도 없이 많은 만성 질환들로 고생하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제 그런 죽음에는 무뎌질 대로 무디어져, 가실 때가 되어 가셨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전 그토록 많은 만성 질환으로 괴로워하며 사셨으니, 죽음으로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수를 누리지 못한 젊은이의 죽음은 괴롭다. 그것이 몸의 문제가 아닌, 정신의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정신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몸의 문제는 본인이나 타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기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인 경우가 많다. 반면 정신의 문제는, 그 사람의 마음을 한계로 몰아넣은 바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가 그런 시련을 견딜 만큼 강했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때의 기억이 가끔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나 자신과, 응급의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한계를 느낀다. 나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한답시고 응급의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응급실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사람들을 응급실에 오게 만드는 마음의 병에는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일개 의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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