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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30. 2022

'프로 역마러'는 일도 프로

Part1. 그녀는 어쩌다 '프로 역마러'가 되었나

 서울살이 1년 차, 여전히 면접을 보러 다니는 자신을 보며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쯤 되면 '병'이라고. 


 '프로 역마러'가 직장에 다니는 건 쉽지 않다. 누구나 다 힘들다는 일반론은 제쳐두고 라도,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조직에 속하는 일 자체가 맞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꿋꿋이 다녔다. 위기가 올 때마다 이직을 반복하면서. 


 왜냐하면 생존이니까.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해서 안정적인 고정 수입이 필요했다. 1인 기업이나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도 못 냈다. 꿈을 좇느라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안전지대에서 택한 것이 '이직'이다. 이직을 통해 새로운 걸 경험하고, 다양한 일을 해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도 여건도 안 된 나에게 이직은 가장 적절한 탈출구이자 도피처였다. 


 '프로 역마러'라서 즐거운 일보다 힘든 적이 더 많았다. 자신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저 사회생활 부적응자로 보일까 봐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 자신에게도 당당하지 못했다. X는 갈수록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질책이 섞인 말이었다. 어차피 이해 못 할 거 말해봤자 싸움만 날 것 같아서 속으로만 삼켰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동안 직장 공백 없이 이직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가장의 무게가 어떤 건지 네가 알기는 해? 왜 본인의 기준으로 나의 힘듦을 평가하는 거야?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삼키길 몇 년, 결국 터질 대로 터져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다. 관계는 끝났지만 정작 자신과의 관계는 개선하지 못했다. 좀 더 당당해도 되는데 스스로 너무 인색한 나머지 X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곳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정체되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며, 인정 욕구가 강해서 일 욕심은 많지만 성과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나는 '프로 역마러'가 15년 넘게 직장인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이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이런 몹쓸 기질(!)이 직장 생활하는데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고 반문하겠지만 나름 장점이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업무 적응력이 빠르다. 

 무수히 많은 면접을 보고, 연월차를 다 써서 이직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낯선 환경 적응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면접을 볼 때부터 이직할 회사에 대한 분위기 파악에 들어간다. 면접은 단순히 취직을 위한 관문이 아니다. 그 회사에 합격했을 때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다닌 곳은 주로 영세한 중소기업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평판을 듣기 힘들었고, 요즘처럼 취업 관련 사이트가 활성화되지 않을 때라서 순전히 '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외부인이 가장 가깝게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면접 때뿐이다. 회사만 나를 면접 보는 게 아니다. 나 또한 그 회사를 면접 보는 입장이다. 


 면접 때부터 업무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서 입사하면 바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대충이라도 감을 잡으면 훨씬 수월하다. 예를 들어, "만약 입사한다면 바로 투입될 업무는 어떤 것인지", 혹은 "해당 부서에서 담당하는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정도의 이슈 체크는 필수다. 


 간혹 1, 2차로 나눠 면접을 보는 경우가 있다. 1차 때는 보통 해당 부서 팀장급이 나온다. 드물게 팀원들도 같이 보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더욱 냉철하게 그들의 태도를 본다. 당장 입사를 하게 되면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말보다 행동을 유심히 본다. 


 질문할 기회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인지" 등을 묻는다.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듣고 당황해 한다. 역으로 면접을 당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면접 초보일 때는 "회식은 자주 하는지, 야근은 얼마나 하는지, 점심은 어떻게 먹는지" 따위를 물었다. 어차피 대표가 아니면 면접관이나 나나 월급쟁이 신세인 건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프로 역마러'는 새로운 일을 즐긴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 겁부터 내기보다 도전 정신이 발휘되는 것이 두 번째 장점이다. 스타트업이나 신사업을 추진하는 회사에 들어가서 맨 땅에 헤딩하듯이 배우면서 일한 적이 많다. 한 번도 해 보지 않는 일이 주어졌을 때 무조건 "네!" 하며 군소리 없이 일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학원 강사로 들어왔는데 관리자의 자리가 공석이라서 얼떨결에 겸임을 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학원이라 학원 설명회를 개최하라는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기 싫다'라는 감정보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학원의 대표는 따로 있었지만 마치 내 학원인 듯 사활을 걸고 준비했다. 처음이라 미숙한 점도 많고, 생각만큼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서 고생만 실컷 하고 끝난 설명회였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또 한번은 부동산 컨설팅 회사의 기획부서에 입사했는데 관련 계열사로 부동산 중개 법인을 오픈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가지고 일한 적은 있어도 직접 부동산 사무실을 오픈한 적은 처음이었다. 사무실을 계약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대표와 직접 했다. 대표가 '마른 수건도 짜 쓰는' 지독한 짠돌이라서 비용을 아끼려고 모든 걸 직접 감독하고, 문고리부터 전등까지 모든 부품을 가격 비교해서 일일이 주문했다. 


 간판 업자 섭외부터 공사 인부들 주차권 지급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공사가 끝나자 이번엔 사업설명회를 준비했다. 새로 시작하는 곳일수록 무슨 설명회를 그렇게 거창하게 하는지 원. 설명회 팸플릿 준비부터 장소 섭외, 당일 알바 고용, 마지막 정산까지 최종 결정을 제외한 모든 일을 다 거쳤다. 밤 12시 전에 퇴근하면 다행이었다. 설명회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집에 가서 잠만 자고 나왔다. 


 사업 설명회 전날, 새벽 2시까지 퇴근을 못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려서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워 근처 찜질방에서 잤다. 모텔에서 자는건 익숙하지가 않고, 회사에서 호텔을 잡아줄 리는 없으니 그나마 갈만한 회사 근처 최신 찜질방의 개별 수면실에서 잠깐 눈만 붙였다가 씻고 나왔다. 


 설명회에서 발표도 해야 하기에 사비를 털어 샵에 가서 메이크업과 헤어 손질까지 받았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할 필요도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나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고통을 보람으로 승화하는 변태 기질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프로 역마러'의 세 번째 장점은 주도적으로 일한다. 지금 회사를 얼마나 다닐지 알 수 없으니까, 또 스쳐갈 회사니까 대충 하지 뭐, 같은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직의 목적은 커리어를 쌓고, 업무 능력을 키우겠다는 욕심 때문이지 회사 일을 대충하고 편하게 다니려는 속셈이 아니다. 


 대학원과 직장을 병행할 때 되도록 정시 퇴근하는 회사를 찾아 이직한 적은 있어도 편한 데를 골라 간 적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월급 받는 일은 아무리 편한 일이어도 보수만큼의 일은 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업무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회사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관리자가 보기에 책임감 있고 열정적인 직원으로 보이는 효과는 덤이다.


 마지막 장점, 한 회사에 뼈를 묻을 게 아니므로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직 내 역할을 파악해서 최상의 성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묵묵히 혼자 일 다하고, 성과는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둘 정도로 미련하게 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직장에 다녔지만 업무를 보고 배울만한 '사수'를 잘 만난 적이 없다. 거의 대부분 혼자 독학하듯 스스로 일하며 익혔다. 이직을 통해 여러 직장에서 맡은 업무를 해내면서 터득했기에 윗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되, 별로 배울 게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노동을 하게 만든다면, 도저히 개선이 되지 않으면 적절한 시기를 봐서 이직하면 그만이다. 


 만약, 내가 이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데 회사가 인정해 주지 않고 당연시 여기거나 직원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곳이라면 기회를 봐서 이력서에 경력이 될 만한 성과만 챙기고, 당연히 이직한다.

 

 직장에 관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어느 정도 되어 있기 때문에 참는 대신 이직을 택한 것뿐이다. 이런 성미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아무래도 스스로 편해지는 꼴을 못 보는 것 같다. '프로 역마러'라서 직장 생활의 가장 큰 단점은 이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거다. 앞에서 말한 장점 때문에 괴로운 게 가장 큰 단점이다. 




 업무 적응력이 빠르고, 주도적으로 일하며, 상사 눈치도 안 보기 때문에 남들은 6개월, 1년 이상 다니면서 파악할 일을 3개월도 채 안 돼서 판단이 끝나버리니까 더 있기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알면서 모른 척 아무 생각 없이 회사를 다닐 만큼 무딘 성격이 아니라서 더 그렇다. 


 일단 이직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바로 실행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대신 철칙은 있다. 아무리 이직을 해도 지금 회사의 업무를 우선시한다. 누가 봐도 중요한 프로젝트나 입찰이 예정되어 있는데 이직할 회사를 구했다고 무책임하게 관두거나 분위기를 흐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의외로 지키기 힘들다. 이미 맘 떠난 회사인데 뭐하러 어리석게 원칙을 지키는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직을 하기 전에 고민에 고민을 반복한다. 이직을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 스스로 자문해 본다. 


 진짜로 이직을 하고 싶은지 솔직해져야 한다. 이직을 하고 싶은 이유를 생각나는 대로 써 본다. 그 이유 중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바꿀 수 없는 사유 중 가장 힘든 것을 고른다. 그 사유가 이직을 하면 해결되는 것인지 또 한 번 검토한다. 


 검토한 후에도 이직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객관적인 자신의 몸 값을 파악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면 퇴사 후에 준비하는 것보다 몸은 좀 고되지만 심적 부담이 덜하다. 당장 옮기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 내가 구직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파악하는 용도로 면접을 본다. 


 아무리 봐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일단은 후퇴. 포트폴리오를 정비하고, 회사에서 경력이 될 만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한다. 이직을 위해 현재 직장에 더 충실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다가 현재 직장을 더 다니게 될 수도 있다. 이래 저래 손해 볼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퇴사할 때 인수인계를 잘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중요하다. 법적으로 사직서 제출 후 2주 후 퇴사할 수 있다지만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남아 있는 동료에게 폭탄을 던지고 가면 안 된다. 그 폭탄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렇다고 무작정 후임자가 구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면접 볼 때부터 이직 날짜를 조율해야 한다. 


 어떤 회사는 자기네들이 급하다고 당장 와달라고 하거나 일방적으로 날짜를 정해서 이날까지 오지 않으면 입사가 취소된다는 식으로 일방 통보를 할 때가 있다. 얼른 이직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져서 현재 회사는 나 몰라라 했다가 후회할 수 있다. 무리해서 이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전 직장보다 별로거나 비슷한 업계로 옮겼다면 평판이 나빠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입사자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 곳은 직원에게 대하는 태도도 뻔하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강요하길래 내가 취소해 버렸다. 얼마 안 가서 구인 공고가 또 올라오는 걸 보고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보다 중요한 건 내 선택이 잘못되었더라도 '예전 직장이 나았는데 옮기지 말걸'하며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모든 경험이 공부다. 비슷한 직종으로 옮겨도 새로 배워야 할 업무는 늘 있다. 스스로 공부할 자신이 없다면 현재 직장에 좀 더 있는 게 낫다. 


 이직의 위기가 올 때마다 부딪치고 깨져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뒤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는 걸 택했다. 처음에는 생존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유를 위해서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할지라도 절대 꺾이지 않았다. 


'프로 역마러'라서 즉흥적이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지만 자기 행동에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직장 생활을 견디는 것 자체가 힘들 때가 많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물론, 두 번 하고 싶지는 않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과거의 나를 처음으로 칭찬한다. 이 모든 일은 내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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