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그녀는 어쩌다 '프로 역마러'가 되었나
20대 중반, 학원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대형 학원이 강세였는데 군대보다 더한 스파르타식 분위기에 면접을 보러 가서 질려 버렸다. 아직도 기억나는 '교사의 품위 유지 의무'가 있다. '교탁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삐딱하게 서 있지 말것, 자기 책상 정리를 안 하고 가면 벌점 0점, 지각하면 0점, 벌점이 몇 점이상 쌓일 경우 시말서 작성' 등 학창시절보다 더 엄격한 황당한 규칙이 A4 한 장으로 빼곡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내용을 '교사의 품위 유지 의무'라며 입사하면 여기 사인부터 하라고 했다. 요즘 같으면 바로 노동청 신고감인데 그때는 그냥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형 학원은 가기 전부터 숨이 막히니 규모가 작은 학원을 찾았다. 작은 학원은 강사 재량껏 일하면 되는 장점이 있지만 경영이 부실해서 망하는 학원이 많아 월급이 밀린 강사들이 부지기수였다.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학창 시절보다 더 심하게 시험 성적에 목숨 걸고, 하기 싫은 아이들을 억지로 시키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나라도 하기 싫은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학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을 다그치는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이대로는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부동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대학을 첫 번째로 휴학했을 때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는 분양권 전매 제한도 없을 때라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 로또였다. 부동산 소장을 보며 참 하는 일 없이 편하게 돈 번다 싶었다.
처음에는 독학으로 몇 달 하다가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직장도 관두고, 난생처음 오빠의 도움을 받아 학원에 다녔다. 고3 이후로 그렇게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은 적이 없다.
어이없게도 공부가 재미있었다. 공부가 이런 거구나! 이 맛에 공부하는구나!
법 공부가 적성에 맞을 줄이야. 대학생 때 알았더라면 7년 만에 졸업하는 대신 편입을 했을 텐데 아쉬웠다.
합격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뒤가 문제였다.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당장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다. 매달 고정 월급이 시급한데 인센티브로만 버는 부동산 업무는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또 월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갔다. 좋아하는 공부를 발견했는데 예전과 똑같은 삶으로 돌아가니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때까지 내가 가진 경력이라고는 논술 강사, 광고회사 AE,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다였다. 이 셋을 합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분양광고 전문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서울로 오면서 본격적인 이직의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그간 수 십 번의 이직을 하면서 퇴사 사유는 다양했지만 종합해 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서울에서 수십 번의 면접 끝에 구한 첫 직장은 그저 그런 광고회사였다. 서울로 이사 왔을 때가 추석이 지난 9월 중순쯤이었는데 연말까지 갈만한 회사를 못 구했다. 면접은 끊임없이 봤다. 심지어 최종 합격까지 하고도 입사 전날 마음이 바뀌어 가지 않는 곳도 있다. 지금 출근하지 않으면 또 면접을 다녀야 하는 걸 알면서 직감적으로 너무 가기 싫었다.
결국 취업은 했지만 뉴스에서나 보던 출퇴근 지옥을 경험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내 발로 서있는 건지 끼어 있는 건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빽빽한 지옥철과 버스를 탈 때마다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회의감이 심하게 몰려왔다.
회사 업무보다 출퇴근길 적응이 안 돼서 관둔 적이 많다. 오죽하면 구직 1순위 조건이 연봉보다 지하철 환승 최소화, 출근 시간 단축이었다. 지하철 환승 구간이 그렇게 긴 줄 모르고 면접용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발병 나고 뒤꿈치가 다 까져서 밴드를 붙여도 너무 따가워서 절뚝거리며 겨우 집에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차선책으로 오래 타도 환승을 하지 않는 노선에 위치한 회사 위주로 골랐다. 회사 복지가 아무리 좋고, 업무가 흥미로워도 환승 구간이 많으면 눈물을 머금고 패스.
구직 1순위 조건이 충족되어도 관두는 경우는 업무에 비전이 없는 경우다. 그 회사에서 1년 뒤, 3년 뒤 비전이 그려지지 않으면 어중간하게 경력을 쌓느니 일찌감치 관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 위에 사수가 뭣 같거나 아예 사수가 없어서 배울 만한 롤모델이 없는 경우도 비전이 없다. 더 최악은 위에 사수도 없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업무에 적응해 갈 때쯤 갑자기 사장이 낙하산 팀장을 데려오는 경우다. 내 밑으로 오면 모를까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성과에 눈먼 상사는 십중팔구 바로 아랫사람부터 갈구기 마련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 일하는 게 낫다.
대학을 휴학하고 학원 강사를 시작할 때 졸업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주는 학원이 별로 없었다. 받아주기만 하면 앞뒤 재지도 않고 갔다가 무려 6개월치나 월급이 밀려 심하게 고생한 뒤로 월급이 밀리거나 망할 조짐이 보이는 회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촉이 생겼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아무 일도 없이 평탄하게 잘 굴러가고, 직원들과 회식도 하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갑자기 망할 조짐이 보이면 귀신같이 알아챘다. 대표나 상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할 때에 알아채기 때문에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직장 동료에게 말해봤자 괜히 물 흐리는 사람 취급 받는다. 참다못해 면담을 신청해서 직접 물어봐도 다들 아니라고만 한다.
그 길로 이직 준비를 하기 시작해서 구해지는 대로 관둔다. 내가 관둔 뒤부터 회사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져 강제 퇴사를 당하고 "소피 씨 말을 들을 걸 그랬다"라며 후회하는 동료도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한 조짐이 보여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별일 아니겠지 하며 일이 닥칠 때까지 손 놓고 있다가 몇 달씩 월급도 밀리고 노동청에 신고하고 난리 치는 경우를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내가 남보다 한 발 앞서서 예민할 수 있었던 건 생존 본능 때문이다. 어디 기댈 곳도 없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고 생각하면 불안 지수가 최대치로 높아진다.
몇 번의 이직 끝에 오래간만에 오래 다닐만한 곳을 구한 적이 있다. 사장부터 직원까지 크게 나무랄 데가 없는 보기 드문 곳이었다. 출퇴근 시간도 적당했고, 업무 강도도 세지 않았다.
단 하나, 치명적인 문제가 첫 월급인데 사전 통보도 없이 일주일이나 밀려서 나왔다. 창업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나의 불안 레이더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 그날로 이력서를 넣고 일주일 만에 이직을 해버렸다.
관두는 당일까지 대표가 붙잡았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관뒀다. 그때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 간간이 소식을 들었는데 회사 재정이 불안정해서 몇 번이나 사람이 물갈이됐다고 한다. 그 뒤로 회사가 잘되는 것 같았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월급날마다 이번에는 제때 월급이 나올지 걱정하며 다닐 수는 없으니까.
가장 어이없고 치욕스러운 퇴사 사유다.
약 16년 간의 직장 생활 동안 해고당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정식으로 근로계약서를 쓰기 전이다.
첫 번째 회사는 입사 후 수습도 아니고 3일 동안 일당 알바처럼 일을 해 본 뒤 정식으로 근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였는데 대표와 한 명뿐인 임원은 외근이 잦았다. 스타트업이라 직원들의 연차는 고만고만해서 텃세가 심한 여직원 중심으로 분위기가 몰렸다. 문제는 내가 그 여직원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아서 찍힌 것이다.
그 직원은 보고를 빙자한 고자질을 심하게 부풀려서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임원실로 불려 가서 알았다.
"(면접 때와 다르게 정색하며) 백 소피 씨, 회사 업무는 할 만해요?"
"(솔직하지 못하게 가식적인 겸손을 떨며)아 네, 제가 아직 부족해서 배워야 할 게 많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오늘까지만 하고 정리하세요. 3일 치 일당은 3.3% 세금 공제하고 입금할 테니 주민번호랑 계좌번호 주고 가세요."
이렇게 잘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마디 말도 못 한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때는 이직은 그만하고 '나만 참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사실 저랑 잘 안 맞네요. 그리고 콧구멍만 한 회사에서 갑질 좀 하지 마라고 하세요. 직원 인성이 개판이네!"
이 말 한마디 못하고 나와서 몇 달 동안 분해서 잠도 못 잤다. 괜히 안 어울리게 겸손한 척했다가 된통 당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서로 맞지 않을 수는 있다. 그게 내가 모자라다는 뜻은 아닌데 그땐 열등감에 휩싸여서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았다.
그 일은 정식 입사라고 하기도 뭣하니 그렇다 치고, 진짜로 잘린 적이 딱 한 번 있다.
99번 째인가 100번 째인가 면접을 보고 간 나름 기념비 적인(?) 곳이었다. 3개월의 인턴 후에 다시 3개월의 수습을 거쳐야 정식으로 계약을 할 수 있다고 할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처음부터 가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당시 '프로 역마러'로는 드물게 일 년 넘게 한 회사에서 몸과 맘을 다 바쳐 일한 대가로 만신창이가 되어 요양 차 쉬고 있을 때였다. 집에서 쉬는데 너무 불편했다. X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아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싸한 느낌을 접고 회사에 들어갔지만 신설 부서라 담당 업무가 명확하지 않았다. 내 발로 나가야 하는 퇴사 사유가 차고 넘치는데도 다녔다.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하지만 삶이 뜻대로 되면 어디 살 맛이 나겠는가.
도피처로 삼은 직장에서 결국 잘렸다. 그것도 3개월 계약 만료 당일 오후에.
그날은 회사가 이사 가는 날이라 전 직원이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나도 내 짐을 싸고 있는데 점심시간 전에 대표가 불렀다.
대표와 마주 보는데 내 눈을 피했다. 역시 싸했다.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한 대표가 뱉은 말은
"백 소피 씨, 임원들끼리 어제 밤늦게까지 고민했는데 도저히 안될 것 같네요. 이 회사는 대표의 맘대로 하는 곳이 아니고 주주와 같은 권한을 가진 임원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이제 와서 밤늦게까지 고민을 했든 말든 결론은 "지금 나가라"는 거였다. 참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녀도 여전히 색다른 이유로 말문이 막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지금요?"
메아리도 아니고 대표의 말을 따라 하며 직원들이 회사 짐을 싸는 동안 나는 내 짐을 쌌다. 짐을 싸면서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와서 다시 대표를 만나 따졌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한 대표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한 건지 아님 익숙한 건지 "미안하다"라는 말만 했다. 사과를 받았지만 진 기분이었다. 다들 분주할 때라 사람들은 내가 나갔는지도 몰랐다. 그 편이 나았다. 인사를 하기엔 너무 쪽팔렸으니까.
그 회사는 이전하면서 신규 채용을 많이 했는데 퇴사율이 100%가 넘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회사 평판 조회 사이트에서 최저 점수를 받고, "내 원수가 간다고 해도 말릴 회사"라는 최고의 댓글이 달렸다. 역시 요즘 MZ 세대는 나보다 더 똑 부러지는구나 싶었다.
이리저리 이직이나 하는 '프로역마러'면 뭐하나? 부당하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헛똑똑이인데. 굳이 변명하자면 그 당시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관둬야 한다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잘리지 않았다면 괜찮은 척하는 가면을 벗지 않으려고 계속 안간힘을 썼을 테니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의 찬란했던 직장 생활에 퇴사 사유는 많다. '관두거나 망하거나 잘리거나' 사이에는 수 만 가지의 퇴사 사유가 존재한다.
나는 늘 퇴사에 진심이었다. 너무 진심이라 탈이지. 그냥 적당한 마음으로 다녔다면 그렇게 충실하게 퇴사를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진지했다. 그게 뭐라고. 나와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퇴사를 하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알면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건 미련하거나 만 분의 일의 확률로 '혹시나 이번엔 다를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것도 미련하긴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