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그녀는 어쩌다 '프로 역마러'가 되었나
서울살이 7년, 100번이 넘는 화려한 면접 경력의 서막은 이사 오기 전부터 시작됐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 이사 온 다음날, 이삿짐도 채 풀기 전에 면접부터 봤다.
"백 소피님, 8일 11시에 면접 가능하신가요?"
부산에서 한참 이삿짐을 싸던 중 입사 지원한 곳의 연락을 받았다.
"아, 그날은 좀 곤란할 거 같은데요? 한 주만 더 미룰 수 없나요?"
"합당한 이유가 있나요?"
"네, 제가 부산에 살아서 14일에 서울로 이사를 가거든요."
목소리가 깐깐한 면접관은 핑계가 너무 구체적인지 잠시 멈칫하더니 최대한 미뤄서 이사 다음날로 선심 쓰듯 면접 일정을 변경해 주었다. 보통 면접 일정이 안되면 조율하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느낌이 싸했다.
짐은 싸는 둥 마는 둥 뒷전이고 면접 볼 생각만 가득했다. 부산에서 이사를 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서울로 가는 이사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대단한 착각은 이삿짐을 먼저 트럭에 실려 보내면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일단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이사는 1박 2일이 걸린다. 이삿짐 비용을 아끼겠다고 포장이사도 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큰 착각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이삿짐을 먼저 보내고, 살면서 한 번도 이사 경험이 없는 전남편 X와 친정엄마를 데리고 트렁크 하나 달랑 든 채 KTX로 서울에 왔다. 텅 빈 집에서 얇은 이불 한 장 깔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은 낯설고 두려웠다.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발등을 스스로 찍은 꼴이었다.
이 모든 게 서울로 갈 결심을 한지 단 2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원래는 X가 자격증 공부 때문에 몇 달간 서울 고시촌에서 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잠시 일을 쉬고 있던 나는 '이참에 아예 이사를 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X의 동의를 얻어 (먼 훗날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다음 날 바로 서울에 입사 지원부터 했다. 면접이라도 보러 가지 않으면 차일피일 미루며 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기적절하게 바로 면접 제의가 왔고, 일정 변경은 할 수 없다고 단호히 얘기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기차표를 끊고 몇 년 만에 서울로 갔다.
'면접이 잘 되지 않아도 어차피 한 번 가보긴 해야 하니까 수험 공부할 주변 집이나 알아보지 뭐.'
겸사겸사 올라가서 본 면접은 어이없게도 기획 부동산이었다. 넓기만 한 빈 오피스텔에 책상만 일렬로 쭉 갖다 놓고, 다단계식 면접을 보는 곳이었다.
지금은 구인 공고만 봐도 사기꾼 집단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지만 그때는 면접 초보라 마음이 다급했다. 면접은 실패했지만 살만한 집은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집은 잘 나오기 힘드니까 맘에 들었을 때 바로 계약해야 해요!"
부동산 소장 아주머니의 부추김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래? 나도 공인중개사라고!
"생각 좀 해볼게요."
"새댁, 새댁이 이 동네가 처음이라 그런가 본데 서울은 맘에 드는 집이 있으면 바로 계약을 해야 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못 구해."
고시촌이라는 동네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시 언제 올라올지 모르니 X에게 전화로 대충 설명하고 집을 계약해 버렸다. 입주일은 다음 주 추석만 지나고 바로 오기로 했다.
가족들에게 서울로 이사 간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삼십 년 넘게 산 고향을 처음으로 떠나 낯선 지역에서 X는 수험 공부를 하고, 내가 뒷바라지를 하는 누가 봐도 고생길이 훤한 길을 불과 일주일 남겨놓고 말했으니 다들 황당한 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간의 삶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금세 이삿날이 다가왔다. 서울에 몸만 먼저 온 다음날,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집 앞 골목에 택배 마냥 짐을 죄다 쏟아놓고 가버렸다. 짐을 옮기는 인부는 따로 왔지만 포장이사가 아니라서 집 안까지 옮겨주는 것까지만 했다.
이사를 하느라 부산스러운 소리에 위층에 사는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와서 간섭을 하자 X는 무턱대고 화를 냈다. 짐이라도 지키라고 했는데 하는 꼴을 보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아 도서관으로 보내버렸다. 집 구조에 맞는 적절한 가구 배치고 나발이고 길가에 늘어선 볼품없는 짐들을 어서 빨리 안으로 들여놓기 바빴다.
짐을 빈 공간에 채워놓기만 한 채 나는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고, X는 시공간 감각이 없는 수험 생활에 돌입했다. 몇 달 뒤, 겨울 이불을 꺼내려고 보니 그제야 이불 한 세트가 없어진 걸 알았다. 이불뿐만 아니라 내 가방과 몇 가지 짐도 없어졌다.
이사 당일, 길가에 짐이 박스 째 놓여 있으니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가져가 버린 것이다. 옆집 아줌마 말로는 "이 동네 수준이 원래 그렇다"라고 했다. 그럴까 봐 X에게 보고 있으라고 한 건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이사를 한 다음 날, 엄마를 서울역에 데려다 주기 전에 면접을 봐야 했다. 이사 다음 날이라 손볼 곳이 있어서 수리 기사를 기다리다 늦어져 택시를 탔다. 이사 오기 전에 면접을 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보는 첫 면접이나 다름없었다. 면접장 근처 카페에 엄마를 데려다 놓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백 소피님, 경력이 많으시네요.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좀 있다 대표님이 오시면 이대로 보여드리면 됩니다."
면접관의 말을 듣고 거의 다 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대표를 기다렸다. 곧이어 인상을 쓴 대표가 등장했다. 첫인상은 대부분의 대표들이 그렇듯 별로 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만 대충 확확 넘겼다.
"(여전히 인상을 구기며) 언론사 경력이 없네? 뭐, 관련 경력도 없구먼?"
그 회사는 언론 PR을 주로 하는 곳이었고, 대표 또한 언론사 출신이라고 했다. 면접관이 보인 호감과 반응이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대표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건 똑똑히 기억한다. 더 황당한 건 내 대답을 듣자마자 면접관을 한번 째려보더니 그대로 나가 버린 것이다.
본인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자리에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대표의 빈자리를 멍하니 보다가 면접관과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 그 면접관이 더 안쓰러웠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앞으로 안 보면 그만이다.
면접관을 쳐다보며 '나야 이딴 회사 안 다니면 그만이지만 당신도 오래 못 견디겠군.'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삿짐도 내팽개치고 면접을 보러 왔는데 너무 허무했다.
지금 같았으면 대표가 그런 무례를 범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실제로 7n 번의 면접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먼저 말을 끊고 나가버렸다. 정말 통쾌했다. '을'만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거랄까.
그 시간까지 엄마는 낯선 카페에 덩그러니 앉아 계셨다. 서른 넘도록 한 번도 타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딸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울 입성 후 첫 면접부터 말아먹었지만 계속 달려야 했다. 날마다 미친 듯이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수십 통의 이력서를 넣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가뜩이나 길치에 서울 지리도 몰라서 마구잡이로 일정을 잡다 보니 동선이 꼬인 날도 부지기수다. 하루 두세 번씩 면접을 보는 날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동분서주하느라 집에 와서 녹초가 됐다. 심지어 면접을 보러 가는 지하철에서도 일자리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넣었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직장을 구하는 이유는 내가 가장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을 곳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이 무작정 서울에 왔기에 겨우 몇 개월 정도 버틸 만큼의 생활비밖에 없었다.
급하다고 아무 데나 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생활이 될 만큼은 벌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서울의 임금이 박했다. 부산보다 물가도 훨씬 비싼데 대체 이 월급으로 어떻게 먹고살란 말인지, 서울살이가 팍팍하다던 고향 친구들의 말이 새삼 이해가 갔다.
지방 인문대 출신의 보잘것없는 스펙을 가진 30대 중반의 기혼녀.
누가 봐도 경쟁력이 없는 불리한 조건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만은 자신 있었다. 자기소개서에 최대한 나의 장점을 어필할 수 있게 진정성 있는 내용을 쓰려고 했다.
코로나 전이라서 경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을 때라 구인 공고 자체는 많았다. 입사 지원 대비 서류 합격률은 약 20% 내외. 서류 합격률 대비 면접 후 최종 합격률은 전성기 때는 90% 이상이었다.
문제는 취직이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인 '프로 역마러'라는 약점이 있었다.
취직은 1차 관문일 뿐, 직장 자체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입사 후 보통 수습 기간을 거치는 데 그 기간도 못 채우고 관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최대 1년을 넘기기 힘들었다.
입사와 동시에 이직을 준비했다.
퇴근 후 면접을 보거나 월차를 면접 보는 데 다 썼다. 하도 구직 사이트를 자주 봐서 지원을 한 곳인지 아닌지 헤갈렸다. 같은 곳을 또 지원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면접 본 회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퇴사를 위해 취직하는 사람 같았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출근보다 면접을 더 열심히 봤다.
어느 순간부터 X는 어디에 면접 보러 가는지 묻기를 포기했다.
"오늘은 또 어디로 면접보러 가?"
"오늘은 면접이야? 출근이야?"
"이번엔 또 며칠 짜리야?"
"공부하는데 너무 불안해. 좀 오래 다닐 곳을 구해."
어느 날은 면접 보러 간다고 했다가 곧 며칠 뒤에 취직했다고 하고, 또 얼마 안 가서 면접을 본다니 본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리라. 변화를 싫어하는 전형적인 공무원 타입인 그가 '프로 역마러'인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서운함은 나의 몫일뿐.
사실 '프로 역마러' 기질은 서울 오기 전부터 있었다.
논술학원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학교 시험기간만 되면 주말 공휴일 할 것 없이 아이들을 시험 잘 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 쥐어짰다. 선배 강사에게 학원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다른 일을 하지 않냐고 했을 때 하나같이 하는 말은,
"이제 와서 내가 뭘 하겠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인데."
나이 들수록 현재의 직업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한다니, 이보다 슬픈 말이 어디 있나! 나도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평범하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싶었다.
학원 강사가 일반 회사 직장인으로 직종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관련 경력이 없어서 면접 기회도 귀했지만, 막상 입사하고 보니 업무 환경이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회사 일은 (근로계약서 상) 주말 근무는 안 하는 대신 대가 없는 야근이 비일비재했다. 근무 시간만 따지면 학원 일보다 임금이 낮았다. 고민 끝에 학원 강사로 되돌아갔다가 결국 입시 지옥보다는 야근 지옥이 낫겠다는 생각에 다시 회사를 갔다.
서른 즈음, 학원이냐 회사냐 왔다 갔다 하는 악순환을 없애기 위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관련 일을 하려고 면접을 보니 부동산 중개 업무는 고정 수입이 없고, 차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중개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할 때 재미있어서 나랑 잘 맞을 줄 알았는데 그냥 법 공부가 재미있던 거였다.
서른에서야 공부의 맛을 알았다. 법 공부를 해서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사법고시가 폐지되기 직전이었는데 그게 아니라도 공부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공부를 못하는 한이 맺혀서 X가 전문 자격을 따서 직업을 바꾸고 싶다고 했을 때 선뜻 뒷바라지하겠노라 큰소리쳤다. 내가 못한 걸 대리 만족하는 부모 심정 같았다.
20대부터 서울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을 하지 못했다. X의 수험 공부를 핑계로 드디어 서울에 오게 되었으니 절반은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프로 역마러'에게 서울은 최적의 환경이었다. 사람도 많고, 회사도 많고, 경험할 거리도 많았다. 그만큼 고생 거리도 넘쳤지만.
서울 입성 2년째, 면접 횟수가 75번을 돌파했다. 일 년에 약 38번, 한 달 평균 3번, 일주일에 1~2번씩 면접을 본 셈이다. 3년 때부터 조금씩 걸러내서 연평균 10번 정도 보다가 6년 차에 100번을 돌파했다.
면접 제의를 받은 곳마다 갔으면 3년 안에 100번을 채웠을 것이다. 최근에도 면접을 보았다. 이제는 면접이 아니라 취재를 하러 가는 기분이다. 면접을 보면 대표나 임원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 회사 분위기를 살피는 데 유용하다.
100번이 넘는 면접과 수십 번의 이직을 반복한 건 굳이 변명하자면, 직장에 적응을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상사와의 트러블로 그날로 회사를 박차고 나온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동료가 더 많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했다. 커리어가 중요했기에 사생활보다 일을 우선시했다.
아무리 입사와 동시에 이직을 준비한다지만 이번에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늘 진지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가 달린 일인데 누가 할 일 없이 이직을 하나? 직장에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 직장에 웬만하면 쭉 있는 이유도 새로운 직장이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
그때는 정말 '역마살'이 제대로 '프로답게' 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