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그녀는 어쩌다 '프로 역마러'가 되었나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로 이직과 면접은 늘 함께 했다.
이직은 나의 커리어를 키우는 수단이었지만 대놓고 자랑할 만한 거리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직이 잦은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 취급을 당할 수 있다. 아무리 '프로 역마러'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이직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보잘것없는 경력에 비해 100번이 넘는 면접과 수없이 많은 이직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건 나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술학원 강사를 하면서 강의보다 학부모 상담을 더 많이 해서 그런가.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닌데 면접이나 일대일 인터뷰에 강한 편이다. 서류 심사만 통과하면 면접에서 합격률은 전성기 때 90%에 육박했다.
처음부터 면접의 달인이 된 건 아니다. 100번이 넘는 면접을 봐도 첫 만남은 늘 긴장된다. 면접을 하도 많이 다니다 보니 어느 정도 나만의 데이터가 쌓여 징크스 같은 '시그널'이 생겼다. 징크스는 양날의 검과 같다. 한번 징크스에 빠지면 면접을 보기도 전에 섣불리 판단하게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면접 전에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어서 긴장이 덜 되는 효과가 있다.
면접을 보기 전이라도 해당 회사에 관해 알 수 있는 여러 시그널이 있다. 참고로 내가 경험한 회사는 대기업은 차치하고 중견 기업은커녕 직원 수 5인 이하 ~ 50명 미만의 약소 기업만 해당한다.
첫 번째 시그널, 면접 제의 연락을 회사 전화로 하지 않고 개인 휴대폰으로 하거나 문자만 오는 경우는 일단 한번 거른다. 아주 사소한 거지만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일의 체계가 없을 확률이 높다. 간혹 규모가 작은 회사의 경우 대표가 인사 업무를 겸해서 직접 휴대폰으로 할 때가 있다. 그래도 역시나다. 합격을 해도 근무 조건이 별로거나 그 회사의 대표나 임원의 첫인상이 나빠서 거절한 적이 많다.
두 번째 시그널, 면접 장소와 시간을 정할 때 통화하는 태도를 본다. 고압적인 자세로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시간만 고수한다면 최대한 뒤로 미룬다. 일단 일정을 잡되, 다른 곳에서 제안이 와 일정이 겹치면 먼저 정한 일정이라도 취소한다. 물론 미리 면접에 불참한다는 연락은 줘야 한다.
세 번째 시그널, 두 번째와 비슷하긴 한데 면접 장소를 알려주면서 "홈페이지나 구인 공고에 적힌 주소대로 오라"는 식의 말만 하고 별도의 문자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는 경우도 한 수 접는다. 회사가 지하철 역 코앞이라도 면접 일시와 장소를 리마인드 하는 문자를 보내는 게 기본이다. 나 또한 인사담당자였을 때 면접 볼 사람이 한 둘이 아니어도 일일이 문자 메시지를 다 보내고 더블 체크를 했다.
네 번째 시그널, 회사가 있는 건물의 우편함을 확인했을 때 우편함 겉면에 회사 로고가 없거나 우편함이 넘쳐 있으면 그 회사는 관리가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만약 대형 오피스텔인데 로비 앞 층별 안내도에 다른 회사 이름은 다 나와 있는데 면접 볼 회사만 이름이 없거나 회사 정문 혹은 입구 현관문에도 명판이 없으면 최악이다. 아무리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라도 명판은 회사의 얼굴이다. 반대로 회사의 업력에 비해 인테리어가 너무 삐까번쩍해도 의심해 봐야 한다. 내실보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는 회사치고 재정이 어려워졌을 때 직원 월급부터 밀리지 않은 곳을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건 나 같은 극소수의 길치에만 해당하는 얘기인데 아무리 초행길이라도 면접 장소를 한 번에 찾지 못하고 헤매면 그날 면접은 일진이 안 좋다. 지도 앱을 보고 찾아간다고 해도 회사가 헷갈리는 골목길에 있거나 간판도 잘 안 보이는 소형 건물의 2~3층에 있는 경우가 특히 심하다. 어떨 때는 신기할 정도로 한 번에 찾아가는 반면, 근처를 몇 번이나 헤매다가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은 적도 있다.
면접도 보기 전에 길을 헤매면 상당히 지친다. 특히 여름철이나 눈비가 올 때, 불편한 면접 복장으로 낯선 동네를 헤매면 몇 배로 지친다. 이미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 면접을 보는데 하필 면접관이 너무 갑질을 하거나 어이없는 압박 면접을 하면 성의 있게 대답하기 싫어진다.
면접 횟수가 80번인가 넘어갔을 때부터는 굳이 시그널을 살피지 않고 면접 제의 통화만으로 합격 여부를 정확하게 맞추는 신기가 생겼다. 특히 통화한 인사담당자가 임원급이라면 이때 판가름이 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화 통화로 1차 면접을 볼 경우 당황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답만 잘 하면 호감을 살 수 있다.
잘 못하겠으면 부정적인 대답으로 시작하는 말만 조심하면 된다. 예를 들어, 대답을 할 때 "그런 업무는 할 줄 모릅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일이 너무 많으면 힘들지만"처럼 말하지 말고, 같은 말이라도 이왕이면 긍정적인 뉘앙스로 바꿔서 말하는 게 좋다. 듣고 보면 다 같은 맥락의 말이라도 면접관의 귀에 부정적인 인식이 먼저 뇌리에 꽂힐 확률이 높다.
자, 이제 한 고비 넘기고 드디어 면접 장소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면접 볼 회사에 왔을 때 시그널은 따로 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본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물 한 잔도 안 주는 곳이 있다. 코로나 전에도 그랬다. 내가 아무리 수퍼 을이라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방문객인 셈이다. 설사 면접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잠재적인 고객이 될 수 있는데 잡상인 취급한다면 그 회사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그 다음, 면접관이 자기소개는 커녕 명함도 안 주는 곳은 무조건 믿고 거른다. 본인이 갑이건 말건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겸손해야 한다. 면접자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 일부러 레스토랑 같은 곳에 가서 웨이터를 대하는 태도를 살핀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면접 때 잘 보이려고 아무리 말과 행동을 포장해도 평소의 바디 랭귀지까지 바꾸기는 힘들다.
세 번째, 면접을 보면서 그때 내 이력서를 처음 보는 면접관이 있다. 상황 따라 다르지만 만약 인사담당자가 1차로 거른 서류라서 믿고 보는 거라면 그 자리에서 내 이력서를 봐도 괜찮다. 그게 아니라 그 회사 대표가 원하는 조건과 전혀 다른 이력서를 이제야 봐놓고는 마치 내가 부족한 것처럼 무시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경우, 참고만 있으면 두고두고 병 난다.
서울 와서 제일 처음으로 면접을 봤을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몇 년 전, 구인공고 사이트에 자주 올라오는 회사가 있었다. 사람을 너무 자주 뽑는 것 같아 지원하지 않으려고 했다. 담당 업무가 내 경력과 비슷하고 더 해보고 싶은 분야라 혹시 몰라 지원을 했다.
곧이어 회사 대표와 면접을 보게 되었다. 역시나 최악의 면접이었다. 대표실에 안내를 받고 들어 갔을 때 대표는 통화 중이었다. 면접을 볼 거면 통화를 다 끝내고 오라고 하던가 아니면 잠시 양해를 구하던가 해야 하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이 계속 통화를 했다. 마침내 통화가 끝나고 자리에 앉으면서 의례적인 양해의 말을 하길래 나도 인사치레로 한 마디 했다.
"아, 괜찮습니다. 다만 사업상 중요한 통화이신 거 같은데 제가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들어봤자 무슨 말인지도 모를 텐데 뭘."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다 알아들었는데? 회사 연매출 실적이 모자라니 가짜로 세금 계산서 좀 미리 끊어달라고 구걸하는 소리였잖아, 이 사기꾼아!
속에서 올라오는 내적 외침을 무시하고 다시 표정 관리를 했다. 대표는 그제야 내 이력서를 보더니 또 경력을 까기 시작했다.
"우리 쪽에서 원하는 ~~ 관련 경력은 없나 봐요?"
"이력서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임기응변으로 좋게 좋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넘어가나 싶더니 또 비슷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경력을 속인 것도 아니고 이력서에 나와있는 거 보면 모르나? 참다못한 나는 이미 망한 면접이니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계속 헛소리만 내뱉는 대표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대표님, 그럴 거면 저를 왜 부르셨어요?"
대표는 당황한 듯했으나 그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뭐, 유사 경력도 있고 해서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한번 기회를 줘 보려고 했지."
네, 대단한 박애주의자 나셨네요. 내가 별 반응 없이 뚱하게 앉아 있자 면접의 하이라이트, 희망 연봉을 물었다.
"00이요."
어차피 갈 마음도 없고 될 일도 없기에 전 직장보다 훨씬 높게 불렀다. 대표는 멈칫하더니 마지막까지 기선 제압을 하려고 용을 썼다.
"백 소피 씨가 00만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입증을 하면 검토해 보죠."
"네, 그러세요."
그러든가 말든가 당신이야 말로 내가 왜 너네 회사에 입사해야 하는지 입증을 해야 할걸?
얼굴 표정만으로 무언의 눈빛 레이저를 쏜 뒤 목례만 까딱하고 나와버렸다. 그 회사는 한동안 계속 사람을 구하다가 사라졌는데 아마 망한 듯했다.
지금이야 회사 평판을 조회해 볼 수 있는 사이트들이 잘 되어 있으니 면접 보기 전에 조회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평은 몰라도 나쁜 평은 대부분 사실이라고 보면 된다.
이외에도 여러 시그널이 있지만 100번이 넘는 면접을 보고 내린 최종 결론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다. 이러니 내가 '프로 역마러'가 안 되고 배기냐고.
아, 노파심에 한 가지만 더 덧붙이겠다.
요즘은 면접 시장에서 손을 뗀 거나 마찬가지라서 친한 동생에게 전해 들은 얘기다. 요즘 스타트업 회사들이 조금이라도 투자를 받아서 채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자기네들이 무슨 실리콘 밸리인 줄 알고 자꾸 1차, 2차, 최종 면접 이런 식으로 과정을 나눠서 사람 진을 빼는 추세라고 한다.
특히, 서류 심사 통과 후 과제 수행을 요구할 경우 기본 사례비조차 주지 않으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어설프게 형식만 갖춰 과제를 냈다가 떨어지면 그 시간조차 아깝다. 만약 과제비를 준다고 하거나 이와 상관없이 꼭 가고 싶은 회사라면 과제가 뭔지부터 살펴라. 아는 동생이 면접 볼 회사 과제랍시고 내 준걸 보고 너무 어이가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건 무슨 과제가 아니라 실제로 본인들이 해야 하는 업무를 떠넘기는 꼴이었다. 한 달은 족히 걸릴법한 프로젝트 수준의 과제를 내주면서 내부인만 알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한 일을 사리 분별 못하고 주는 경우도 여럿 봤다. 그 과제를 낸 사람이 같이 일할 상사라면 앞으로 야근 지옥이 펼쳐질 각오부터 하는 게 좋다.
아는 동생은 이직이 너무 절실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과제 수행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최종 합격한 곳은 처음부터 과제가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이직을 해서 지금에서야 "그때 과제 같은 걸 하는 게 아니었다"라고 얘기하지만 또 같은 상황이 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동생들이 취업 때문에 고민 상담을 할 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나를 불러주는 곳이 여러 군데라고 해서 기고만장할 것도 없고, 서류 합격되는 곳이 거의 없거나 면접 보는 족족 떨어진다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내가 갈 곳은 단 '한 곳'이다. 설사 가고 싶던 회사에 떨어졌다고 해서 자신을 비하하지 마라. 네가 모자란 게 아니라 단지 그 회사가 원하는 조건이 아니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