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그녀는 어쩌다 '프로 역마러'가 되었나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단 한권만 꼽으라면 단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은 10대, 20대, 최근 서평 모임 때문에 또 한 번 읽었으니 총 3번을 읽었다. 읽은 시기가 다 달라서인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나이가 더 들어서 또 한 번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다.
헤르만 헤세는 수도승처럼 인간 본연의 고통을 탐구하고, 삶의 본연을 꿰뚫는 구도자 적인 삶과 일치하는 글을 많이 썼다. 헤세는 데미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고, 그러한 길을 찾아내려는 실험이다."
그는 또 "완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었던 사람은 없다"라고 단정 짓는다.
'프로 역마러'로 살면서 한 번도 완벽을 추구한 적은 없다. 그저 나답게 살려고 애썼다. 나다운 게 뭔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완전히 자기 자신일 수는 없지만 그것에 다다르기 위해 모험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나다운 게 아닐까.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선악의 경계가 분명한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안전지대 밖의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다. 싱클레어는 자기에게 다다르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 끝에 그가 원했던, 데미안과 같은 모습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악의 구별이 뚜렷한 흑백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단순 명확할까. 살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수록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옳다고 믿어왔던 진리도 영원불멸일 수 없다. 싱클레어도 너무 힘들어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났을 때 고민을 털어놓는다.
"길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어려운 건가요?"
나도 묻고 싶다. 왜 이렇게 '프로 역마러'가 되어 직장이든 인간관계든 자기 계발이든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방랑자처럼 떠돌까?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지금처럼 포기하지 말고 나아갈 것을 격려한다.
"당신은 당신의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질 거예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야심 차게 서울에 와서 몇 년간 가족, 친구, 가까운 사람과 연락도 끊은 채 100번이 넘는 면접을 보며 서울 전역을 떠돌았다.
나는 그냥 사는 대로 살아지는 그저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거야. 내가 내 인생을 만들 거야.
반복되는 직장인의 삶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어느 순간 꿈에서 멀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 봐, 무더져서 더 이상 꿈을 찾지 않아도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또, 이런 허황된 꿈만 좇아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늘 불안한 삶을 살다 늙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가진 능력은 미미했고, 직장 외에 무슨 일을 병행할 만큼 에너지가 많지도 않았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에게 영어 공부 방법을 물었더니 영화를 하나 추천해 주며 반복해서 보라고 했다. 당장 그 영화를 구입해서 서너 번은 봤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반복하면서 암기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의 실행력에 감탄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영화로 영어 공부하기가 실패로 끝난 뒤 영어 공부를 빙자한 미드 보기만 하며 영어를 듣는다는 착각에 빠졌다. 영어든 다른 외국어든 한 가지라도 잘하면 기회 자체가 달라질 텐데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못 견뎠다.
돈 공부를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계발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인 말들 뿐이었다.
옘병! 자기 계발서를 보고 내 인생이 바뀌긴커녕 이걸 쓴 작가만 더 부자가 되는 거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부자가 되는 것인가? 평생 추구할 목표가 '돈'인지 헤갈렸다. 돈이 있어야 경제적 자유를 얻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데 언제까지 할 거야? 나이가 60, 70이 되어도 원하는 부자가 되지 못하면? 그 목표가 다른 걸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나?
점점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모순을 경험하며 직업으로 부자와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인중개사를 땄다. 부동산 전문가가 되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공인중개사를 취득했으나 돈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추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싫었다.
작심삼일로 끝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운동, 다이어트, 글쓰기, 대학원, 하다 못해 연애까지 시작할 때는 너무 하고 싶었는데 막상 하면 금세 실망하고 하기 싫어져 관두는 패턴이 반복됐다.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
"누군 좋아서 직장에 다녀? 너무 참을성이 없는 거 아니야?"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나 혼자 착각하고, 나만 모르는 사실일까 봐 두려웠다. 갑자기 서울로 간 것도, 거기서 거기인 직장을 전전하는 것도, 급기야 다시 혼자가 된 것도 가족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걱정하고 안쓰러워할 뿐.
이미 일어난 일이니 더 깊게 파고들어봐야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속마음을 얘기하고 싶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넌 가족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어. 좀... 별종이지."
엄마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스치듯 말했지만 속에 담아둔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상처받지는 않았다. 아, 그렇구나,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어. 가족이니까 당연히 닮았을 거라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가족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프로 역마러'가 됐는지 더 이상 이유를 찾지 않았다.
태생이 '프로 역마러'인 나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살 때는 그렇게 차이를 못 느꼈는데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몇 년 만에 만난 가족이 직장 동료보다 낯설었다. 그나마 X는 이해하는 줄 알았는데 내 욕심이었다. 나 또한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착각하며 살았다.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 테스트나 혈액형 성격, 별자리, 타로 카드, 사주 풀이, MBTI, 직업 적성 검사, 심지어 우울증 진단까지 안 해 본 게 없다. 볼 때마다 일부분 맞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이런 테스트 결과를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사주 풀이는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정식으로 봤다. 결혼 전에도 안 봤는데 이제야 보다니. 사주 풀이를 두 번 정도 봤는데 비슷하긴 했지만 같은 사주를 두고 역술가에 따라서 해석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면서 좋은 사주, 나쁜 사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부자가 될 팔자라도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는 게 아니듯 본인 하기 나름이다.
사주 풀이에서 '프로 역마러' 답게 이동하는 일도 좋고, 토지와 관련된 일을 하면 좋다고 했다. 사주 풀이보다 더 와닿았던 건 타로 카드에서 소울 넘버라는 게 있는데 완전 내 얘기였다. 소울 넘버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한 자리씩 떼서 각각 더한 뒤 최종적으로 나오는 한 자리 숫자를 뜻한다.
나의 소울 넘버는 2번. 양극단을 오가는 와중에 그 안에서 창조성이 발휘된다고 했다. 고통 속에서 나오는 창의성이라니 참 대가 없는 소득은 없나 보다. 분리되지 않고 안주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한 가지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걸 힘들어해서 이직을 잘한다는 것까지 나와 있었다.
소울 넘버를 설명해 주는 타로 상담사도 나와 같은 2번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결혼을 하거나 조직에 속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본인 같은 직업이 어울린다고 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의 모든 행동을 소울 넘버로 합리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래서 그랬구나!'정도의 설명은 되었다.
안정적이려고 할수록 문제가 생긴다니 평생 고생만 하다 가라는 얘기인지 억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든 직업이든 "꼭 ~~ 해야 해!"라고 정해놓은 일일수록 문제가 생겼다. 정해놓은 기준과 목표에 미치지 못하면 강박적으로 그렇게 만들려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평소에는 관대한 척 하지만 결국 나라는 인간은 자신이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데미안>의 데미안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일컬어 '표적을 가진 자'라고 칭한다. 카인의 표식처럼 '표적을 가진 자'를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이상하게 보일까 봐 아닌 척하지 말고 좀 더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용기를 주었고, 싱클레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하는 것처럼,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세계를 파괴하고 깨어난다. '표적을 지닌 자'라면 깨어난 자, 또는 깨어나고 있는 자로 살기 위해 지속해서 깨어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싱클레어가 가족이라는 달콤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자신이 가진 표적을 알지도 못한 채 공허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는 데미안을 만나고 두렵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한다. 깨어 있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성인이 된 후로 지금까지 거의 반 평생을 부딪치고 깨지면서 겨우 터득한 진리를 데미안은 이미 10대 때 깨달았다.
책 <데미안>은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1897년 생인 헤세가 이 책을 발표했을 때가 1919년이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하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발표한다. 그도 40대 전에 깨달았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헤세는 노벨 문학상 수상식은 물론, 모든 모임과 더불어 자신의 생일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지만 철저하게 아웃사이더이자 방랑자로 살면서 고독을 자처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많은 음악가와 미술가를 사귀고 그림도 그렸지만 어떤 집단에도 속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며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라고 했다.
고독과 외로움을 예술로서 자신만의 경지로 승화시킨 헤세의 삶이 존경스럽다. 이 정도는 되어야 '프로 역마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한참 멀었다.
헤세는 끝없이 경고한다.
"그 누구도 누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심지어 그조차 누구의 모범이 될 수 없으니 "자신을 모범으로 삼지 말 것이며, 누군가에게 모범이 될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하긴 '프로 역마러'인 나를 누가 모범으로 삼겠는가. 쓸데없는 걱정이다.
기성세대가 보면 "부모 말 안 듣고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고생한다"라고 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교사나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 맞지만 교사는 되기 싫었다. 중학생이 되자 선생들의 이중성과 사춘기적 반항심이 겹치면서 싫다 못해 혐오하게 됐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선생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나도 학교에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서는 할 게 없어서 선생을 할까 봐 동기들 다 하는 교직 이수도 안 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가진 직업이 학원강사라니. 집안 사정 때문에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일반 회사에 지원할 엄두도 못 냈다. 아마 갔어도 못 견디고 뛰쳐나왔을 것이다.
교사나 공무원이 안정적인 직업일지는 몰라도, 직업의 우선순위가 안정인가? 무슨 의미의 안정인지 모르겠다. 물론 그 직업이 맞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사람도 많다. 직업의 장점 때문에 나를 끼워 맞출 게 아니라 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성향부터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부모님처럼 직업은 그저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들은 그저 자식이 고생하지 않고 평탄하게 살기를 바란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무슨 재미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지켜봐 줄 수는 없었을까?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교사나 공무원이 되라고 하긴 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면 실제로 몸이 아파서 자유롭게 냅두는 편이었다. 반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묻지도 않았다. 잘하라는 격려나 칭찬을 받은 적도 없다. 부모님이 칭찬에 인색한 건 본인들이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이없게도 나조차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꿈을 좇으라고 나를 응원한 적이 없다. 대신 '프로 역마러'가 되어 떠돌았다. 그 끝에 나만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이 멀고, 아직은 희미하지만 확실한 건 남은 인생 동안 그 길을 좇을 거라는 사실이다. 데미안처럼 자기 자신과 가깝게 완성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