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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역마러'라서 우울해

Part2. 프로 역마러가 롱런하는 법

by 백소피

"나 우울증이래."

"나 때문이네. 그럼 너를 위해서라도 내가 나갈게."


X에게 우울증을 고백한 날, 그는 집을 나간다고 했다.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뺏겼다.


X는 나의 우울증 진단을 듣고, 내 걱정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마치 내가 그를 등 떠민 것 처럼 하는데 집을 나가겠다고 결정한 건 나의 우울증을 모를 때였다. 나의 우울증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 같아 화가 났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끝난 마당에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가 집을 나간 후 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끝내겠다고 할 때까지 X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프로 역마러'의 기질은 인간관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연애할 때 남녀 관계에서 득 보다 실이 많다. 항상 연애의 시작과 끝만 있을 뿐 과정이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호감을 표시하거나 서로 마음이 맞으면 일단 시작한다. 그리고는 부딪칠 때 속마음을 절대 얘기하지 않는다.


"너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냐!"


연애할 때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다. 연애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무조건 잘해준다. 착한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다 받아주고 싫다는 말을 하지 않으니 상대방은 착각한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그제야 잘못을 깨달은 남자는 후회하고 빌거나 밤마다 전화해서 미련을 못 버려도 받아주지 않는다. 이미 혼자 마음 정리가 끝난 상태기 때문이다.


구남친이 뭐라고 악담을 하든 말든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속앓이를 하고 맘고생을 했으니 예전 같을 수는 없다. 그나마 제일 오래 만난 X와는 처음으로 관계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시작과 끝만 있고 과정은 없는' 상태가 반복됐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얘기가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그의 수험 생활로 서로가 지쳐 대화를 포기하게 됐다.


갈수록 관계의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둘이 함께 시소를 탔는데 어느새 혼자서 발만 동동 거리고 있었다. 시작은 좋았는데 위기가 오고 힘들 때 정면 돌파를 하지 않고 또 회피했다. 그는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관계보다 자존심을 먼저 내세우면 위기가 올 때 극복하기 힘들다.




'프로 역마러'는 나의 특성이 잘 내포된 말이다. 직장에서는 역마살이 있어서 한 군데 오래 붙어 있질 못하고, 안주하는 걸 싫어해서 비전이 없으면 여지없이 떠나는 성향으로 발휘된다. 인간관계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솔직하게 얘기하기보다 회피하거나 외부 환경을 바꿔 버리는 성향을 뜻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다.


상대방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거나 서운한 일이 있으면 그 얘기를 상대방에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을 다시는 안 볼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만큼 극단적이다.


20~30대를 지나면서 이런 극단적인 성향은 좀 옅어졌지만 한번 마음의 선이 그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고 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내 식대로 얘기해서 달라질 수 있을까? 나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데.


상처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관계에서 과정이 없었다. 30대가 되었을 때 뭔가 달라지기를 그렇게 바랬건만 20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나이만 먹어가는 삶이 비참했다.




오빠가 26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면서 집안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명무실한 아버지와 신세한탄만 하는 어머니 밑에서 아직 순진했던 20대의 나는 근본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족쇄가 되어 나의 목을 조르고, 발목을 잡는 것도 모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착한 딸', '효녀'가 되고 싶었다.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 자란 건 아닌데 표현할 줄 모르는 부모 밑에서 애정 결핍이 있었다. 지금은 공부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도 그 부모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결핍되게 자랐으니 뭘 몰라서 그렇다고, 부모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낀다.


연민과 별개로 내 일이니까, 내가 힘드니까 괜찮다는 건 아니다. 결혼 직전에 어머니와 정말 많이 싸웠다. 왜 그렇게 볼 때마다 부딪쳤는지 모르겠다. 답답하게 사는 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더 매몰차게 말했던 것 같다. 어머니도 상처받은 인간인지라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부모가 해 준 게 없어도 본인 능력으로 돈 잘 벌고 잘 사는 자녀도 많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났다. 맞는 말이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무슨 뜻이야? 그럼 내가 지금 능력이 없는 게 순전히 내 탓이라는 거네?"

"OO네 아들은 부모보다 잘나서 돈 잘 벌어 호강시켜 주더라."


어머니는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이 말이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족을 떠날 결심을 했던 게. 집에는 말도 없이 서울 사는 친구 집에서 며칠 묵으며 어떻게 해서든 집을 나올 궁리를 했다. 그러나 독하지 못했다. 차마 어머니를 두고 나까지 나갈 수가 없었다.


대신 결혼을 했다. 가족에게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라는 건 결혼을 하고 나서 알았다. 돌이킬 수가 없었다.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혼 후 X의 수험 생활을 구실로 부산에서 최대한 멀리, 서울로 왔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라 X는 틈만 나면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 별로 좋았던 추억도 없을뿐더러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서울에 와서 4년 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안부만 주고받을 뿐 가족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길게 떨어져 본 적도 없었는데 너무 홀가분했다. 자주 못 보는 애틋한 사이가 되니 오히려 더 좋아졌다. 이래서 가족은 멀리 떨어져서 가끔 봐야 되는구나 싶었다.




가족과 멀어진 뒤 본격적인 '프로 역마러'의 방랑이 시작됐다. 서울은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사도 자주 다녔다. 2년의 계약 기간만 끝나면 이사를 했다. 직장을 자주 옮기니까 출퇴근하기 편한 곳을 찾아 이사를 했다. X의 수험생활 때문에 신림동에 자리 잡았지만 거긴 일반 가정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라 수험생에게 최적화된 동네였다. 수험 생활이 2년이 넘어가면서 꼭 그 동네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나자 즉시 옮겼다.


공인중개사를 딴 후 '프로 역마러'에게 가장 최적화된 능력은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이다. 저질 체력의 대명사인 내가 집을 볼 때만큼은 지치지도 않는다. 친구가 이사할 집을 봐준다고 하루에 일곱 군데를 보러 다닌 적도 있다. 새로운 동네를 파악할 때 집을 보는 것만큼 좋은 정보는 없다. 아무리 온라인 사이트에 잘 나와 있어도 집은 직접 봐야 한다. 집 안의 구조와 임대료에 맞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려면 발품을 파는 게 가장 확실하다.


직장은 싫으면 나만 떠나면 그만이지만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시작도 같이, 끝도 같이 한다. 결혼은 둘 다 끝나야 관계가 끝나는 거다. 친구는 환경에 따라 갈리는데 가족과 결혼 관계는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힘들수록, 원치 않게 더욱 끈끈해지길 요구했다.


관계에서 과정을 참지 못한 나는 '프로 역마러'답게 행동에 옮겼다.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했다면, 결혼을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했다. 아무리 시작과 끝만 있는 관계를 맺었던 나라도 이혼이 쉬운 건 아니었다. 합의 이혼이라 절차는 간단했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쓴 건 아니다. 그저 관계의 갈등을 못 견디는 몹쓸 '프로 역마러'의 기질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도 나 자신을 모르는데 감히 누굴 판단하겠는가? 나이 들수록 성숙해지고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점점 겁이 나고 위축됐다. 또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왜 그렇게 인간관계에서는 마음 둘 곳 없이 수없이 방황했을까. 딴에는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다. 이 또한 나만의 착각이던가.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하나 무수히 곱씹고 자책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관계의 불안함은 불면증으로 이어져 밤새 고민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명상도 하고, 책도 읽고, 향도 피우고 이것저것 노력해 봤지만 이 또한 작심삼일로 얼마 못갔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해결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동하고, 바꾸고, 시도하고, 또 상처받고. 이런 패턴이 진절머리 났다. 가장 즐거워야 할 금요일 퇴근길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좌석에 앉아 있는데 어딘가 감정 회로가 고장 났는지 '느닷없이' 슬펐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자 오히려 안심이 됐다. 아, 우울증이라서 그렇구나. 나도 우울증에 걸릴 수가 있네.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안 것보다 증상은 더 오래됐겠지.


처음으로 찾아간 병원은 일반 병원과 달랐다. 왠지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고,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어떤 정신질환으로 왔을지 궁금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면 죄지은 것도 없는데 사람들과 눈도 못 마주쳤을 것이다.


정신과나 마음을 치료하는 상담 관련 센터는 첫 경험이 중요하다. 처음에 자기와 맞지 않는 선생님을 만나면 더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경우를 여럿 봤다. 주위에 소개받을데도 없고 해서 대충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갔다. 이제 갓 개원한 30대 의사 선생님인데 권위적이지 않아서 안심이 됐다.


"어떤 일 때문에 오셨나요?"


첫마디를 듣고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사생활까지 얘기해도 되나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먹였다.


"선생님, 제가 우울증인가요?"


선생님은 "지금 처한 환경이 힘드니 조금이라도 관리를 받아 보자"라고 하셨다. 요즘은 정신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져서 친구끼리 오기도 하고, 오히려 정신 관리를 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거라는 말도 있다.


친구나 지인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것보다 전문가에게 관리를 받는 게 심적으로 안정이 됐다. 내 상태는 환경이 바뀌면서 훨씬 빠르게 호전이 됐다. 선생님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될 때까지는 중요한 결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했지만,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빨리 정리하는 게 나았다.


적당히 살았으면 될 텐데 너무 어깨에 힘주며 살았다. 힘을 좀 빼도 된다는 걸 혼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정신과를 다니며 이쪽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그 해에 다시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나를 위해 한 단 한 가지 일인 대학원부터 포기한 게 후회됐다. 그 학교는 나와 맞지 않아서 관둔 것 자체를 후회하지 않지만 공부를 포기한 건 후회됐다.


상태가 호전되면서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니 병원에 올 필요가 없게 됐다. 선생님은 "언제든지 살다가 조금이라도 불안함을 느끼면 와서 얘기만 하고 가도 된다"라고 했다. 그래도 맘 편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후 관리가 아쉬웠다. 전부터 관심이 있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빠른 실행력의 '프로 역마러'답게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국내 몇 안 되는 특수대학원에 직접 문의하거나 담당 교수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갈 곳을 정했다. 중간에 또 그만두지 않을까 고민도 됐지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큰 법이니 일단 저지르기로 했다.




나의 우울증을 계기로 또 다른 길을 찾았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며 '내가 여기 왜 왔나? 관두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하면서 꿋꿋하게 계속하고 있다. 우울증에 관한 이론을 접하면 나의 경험과 대조해 보며 좀 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누구나 신경증, 도착증, 정신증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해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인간의 정신 병리적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근원을 파헤쳐 보면, 어린 시절 영유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이가 마흔이 됐든, 쉰 살이 됐든 간에 여전히 그때의 트라우마가 무의식에서 반복된다.


이전에 비해 인식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무리에서 튀거나 대중과 다른 것에 대해 관대한 편이 아니다. 남의 일에 그리 관심도 없으면서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이중 습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 사생활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우울증과 이혼 얘기도 가족에게 제일 나중에 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충격을 받았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이혼이나 우울증이나 요즘엔 흔하다고 하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어야 하는데 딸이 그렇다니 급기야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한 번이라도 먼저 괜찮냐고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서운했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나 나나 인생 1 회차인 건 마찬가지인데 본인이 겪어보지 않은 일을 어떻게 이해하겠나. 이해를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나는 주변의 반응을 볼수록 더욱 덤덤해졌다. 좀 더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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