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리라 (요한 볼프강 폰괴테)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부분
시적 화자는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 사내는 시적 화자의 내면의 남성(아니무스)일 것이다.
이 사내는 여러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현실의 사내는 아니무스의 화신(化身)이므로.
이 사내는 만해 한용운의 ‘님’과 같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우리의 <혼자 가는 먼 집>은 늘 연인이 동행한다. 그(녀)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이끌어준다.
괴테는 이런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했다. 무수히 변화하는 아름다움! ‘불변의 아름다움’은 어떨까?
어느 시대나 아름다움의 상(像)이 있다. 미녀상(美女像)은 시대마다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인 미녀상은 반드시 ‘추녀상(醜女像)’을 전제로 한다.
추녀상에 뽑힌 여자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한평생 타고난 얼굴을 저주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 미술은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전시장에 가보면 추한 그림이 얼마나 많은가?
화가들은 각자의 개성을 활짝 꽃피우며 살아가기에,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을 직감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혼자 가는 먼 집>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알게 된다.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