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일도(精神一到)
진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이다. 즉, 어떤 인식도 진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오래 전에 시골에 살 때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방과 후 글쓰기 강사를 했다.
비가오고 있었다. ‘아, 좋은 수업이 되겠구나!’ 나는 아이들에게 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흘끔거리며 뭐 이런 걸 다 그리라고 하느냐의 표정으로 백지에 줄을 아래로 죽죽 그었다.
나는 잠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얘들아, 창가로 가봐. 실제로 비가 어떻게 내리는지 잘 보고 다시 그려봐!”
아이들은 킥킥 웃으며 창가로 몰려갔다. “어? 비가 저렇게 내리네!” 아이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비가 툭툭 끊어지며 내리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모습을 글로 써보라고 했다. 몇 몇 아이들이 ‘비가 실낱처럼 내린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뇌로 본다. 생각으로 본다. 자신의 ‘사고 구조의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사고 구조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뇌에 들어온 언어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항상 의심해 보아야 한다. ‘진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이다. 즉, 어떤 인식도 진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비트겐슈타인)’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연습을 항상 해야 한다. 무엇을 보더라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여 보면 새로운 진실이 보인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실상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 ‘마음의 바탕, 본질’을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의 바탕은 물처럼 맑다. 그래서 다 비친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처음의 마음이 되면, 척 보면 보인다. 그냥 진리가 보인다. 처음의 마음이 되려면, 무엇을 보더라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해야 한다.
한 곳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으면, 언어의 안개가 서서히 벗겨지고 원래의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공부는 기본적으로 마음공부다. 우리는 진리가 어디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망원경,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진리는 보는 대상의 어떤 측면에서만 맞는 진리다. 어떤 사물을 보며 부패해가는 시간을 관찰했다고 생각해 보자.
정확한 시간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이 사물이 부패하는 시간은 세상 어디서 봐도 또 같을 것’이라고.
하지만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찾아냈다. 시간은 보는 곳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밖에서 찾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궁극적 진리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의 뛰어난 선사 조주에게 한 승려가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다.” 뜰 앞에 다른 나무가 있었다면 조주는 그 다른 나무를 말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게 다 진리인 것이다. 진리가 다른 어딘 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뇌세포에 새겨진 언어 때문이다.
언어를 쉽게 넘어서는 조주에게는 보이는 게 다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온갖 현란한 언어가 난무한다.
그래서 언어를 넘어서서 세상을 보는 게 쉽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어의 마법에 걸려 한 평생을 허상 속에서 보낼 수 있다.
유리가 흐려지면 풍경도 흐려지네
유리에 금이 가면 풍경에도 금이 가네
유리가 깨져 없어져도 풍경은 멀쩡하네
- 함민복, <유리> 부분
우리가 마음을 생각할 때는 마음이 아플 때다. 시인은 마음의 파도가 잠시 잦아들자 고요히 마음을 바라본다.
‘유리가 깨져 없어져도 풍경은 멀쩡하네’
세상의 ‘실상(實像)’을 언뜻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