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

by 고석근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


가상의 실재란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서



진시황제가 죽은 뒤 군량을 운반하던 농민출신의 책임자인 진승은 장마로 인해 기일을 어기게 되자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농민들에게 말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 왕, 제후, 장군,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그의 말은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효시다. 그런데 그의 선구자적인 말을 많은 농민들이 호응했을까?


저항의 구호로 들렸을 것 같다. 그 후 농민반란은 실패하고 유방에 의해 한나라가 세워진다.


다시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세상’으로 되돌아갔다. 중국 드라마 ‘포청천’을 보며 생각한다.

포청천은 중국 송나라의 청백리다. 판관 포청천은 송의 법을 황족,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엄격히 적용한다.

포청천 드라마 ‘창해월명주유루’에는 황궁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한 많은 궁녀가 나온다.


그녀가 우연히 황제의 은총을 받게 되자,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장귀비가 그에게 절도죄를 씌워 감옥에 가둔다.

그녀는 환관 진삼복의 도움으로 무사히 궁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 후 그녀는 한 남자의 아들을 낳아 황자로 기른다.


그녀의 아들은 문무를 겸한 훤칠한 대장부가 되어간다. 아들이 20살이 되던 해, 그녀는 포청천을 통해 황제를 알현하게 된다.


마침 아들이 없던 황제는 그녀의 아들을 친아들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포청천은 그녀의 아들이 황제의 혈통이 아님을 밝혀낸다.


이 장면에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포청천은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 ‘정말 백성을 위한 사상을 가졌는가?’

황제는 자신의 혈통이 아니어도 그녀의 아들을 황자로 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포청천은 끝내 반대한다.


그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백성보다는 황족, 귀족의 권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형에 처해지고, 황제는 그녀의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


지금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능력과 품성을 갖춘 그녀의 아들이 황자가 되고 태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말했다.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많은 사람들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실재가 되어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못하게 한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백 년 전에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고 물으며 세운 근대민주주의.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물질을 숭배하고 있다. 씨(혈통)가 사라진 자리를 돈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돈은 종잇조각에 불과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돈을 신으로 숭배해야 할 것이다.



돈도 내겐 하찮은 물건.

사랑의 신도 내겐 비웃음거리.

명예욕은 아침이면 자취 감추는

헛된 꿈에 지나질 않고.


- 에밀리 브론테, <늙은 금욕주의자> 부분



많은 사람들이 늙어 ‘금욕주의자’가 된다. ‘다 쓸데없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젊어서 금욕주의자가 될 것이다.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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